[한일관계 리셋하는 일본]<3>사라지는 지한파 목소리
올해 2월 9일 일본 도쿄 게이오(慶應)대 미타 캠퍼스. 눈이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한일 전문가들과 청중 100여 명은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질서 구상’ 심포지엄에 참석했다. 문정인 대통령통일외교안보특보는 ‘한반도의 평화체제와 비핵화’를 주제로 30분간 기조 발제를 했다. 이어진 패널 토론 시간.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서 일본의 역할이 하나도 없어 쇼크를 받았다.”(기미야 다다시·木宮正史 도쿄대 교수)
“현재 구조에서 일본의 역할은 하나도 없을 수밖에 없다.”(문 특보)
“일본 정부와 시민들은 ‘북한 비핵화를 믿기 힘들다’는 의견이 많다. 솔직히 말해 나도 그런 불안감이 있다.”(기미야 교수)
“일본 외무성은 북핵 해법에 대한 우리 대통령의 주장을 완전히 무시하며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항상 ‘친북 정권이다’ 등 음모론도 제기한다. 너무 심하다.”(문 특보)
일본 학자들이 좀처럼 공개 설전을 벌이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할 때 매우 이례적이었다. 이를 두고 일본 외교 소식통은 “그만큼 일본 지식인이 한국에 실망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과거 한일 관계가 나빠지면 일본 내 지한파 지식인들은 정부의 강경책을 비판하며 갈등을 완화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지금은 이런 지한파 지식인들의 목소리가 거의 사라졌다. 게이오대에서의 날 선 공개 설전은 이런 기류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원덕 국민대 교수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1강 독주가 장기간 이어지다 보니 자유로운 토론 분위기가 약화됐다. 지한파 지식인들도 자기 검열을 강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우익들의 위협도 지한파 지식인들의 입을 닫게 만들고 있다. 이영채 일본 게이센(惠泉)여학원대 교수는 2월 한 일본 방송에 출연해 “한국 대법원이 내린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한국 행정부가 관여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 직후 2주 동안 그가 주문한 적 없는 영양제, 술, 차 등 택배 물품 25개가 배달됐다. 이 교수는 즉각 경찰에 신고했지만 경찰은 ‘누가 보낸 것인지 모른다’며 사건을 접수하지 않았다. 이 교수는 이를 두고 “한국 정부를 옹호하면 우익들이 테러 위협을 가한다. (그래서) 상당수 한국 교수들이 방송 출연을 꺼린다”고 말했다.
도쿄의 한 사립대에 재직 중인 일본인 A 교수는 지난달 1일 일본 정부가 처음 수출 규제 강화 방침을 발표했을 때 “정치 문제로 경제 보복을 하는 것이다. 철회해야 한다”며 아베 정권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런 그에게 일본 정부가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배제하는 각의(국무회의) 결정을 했던 2일 다시 연락하자 “정부는 적절한 수출 관리 조치를 했다. 한국이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불과 한 달 만에 의견이 바뀌어 있었다.
사석에서도 한국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는 일본 지식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특히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문제 삼고 있다. 일본인 B 교수는 “한국 재판부의 판단만 존중하고 일본 정부의 입장은 무시되고 있다. 일본 기업에 피해가 일어난다면 일본인 전체가 한국에 등을 돌릴 것”이라고 말했다. 박철희 서울대 교수는 “작년 10월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이 나오고 난 후 지한파들의 목소리가 줄어들기 시작했다”며 “일본 정부의 요청에 한국이 묵묵부답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어 한국 측 입장을 방어해주기가 어려운 처지”라고 전했다.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일본 기업이 응한다면 일본은 추가로 이어질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각오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는 일본 정부뿐만 아니라 기업들이 징용 배상을 두고 ‘절대 응할 수 없다’는 태도로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본 외무성 내 이른바 ‘코리안 스쿨’도 사라지고 있다. 올해 1월 외무성의 한 간부는 “일본 정부 내에서 ‘한국과 잘 지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외무성의 한국 담당자밖에 없다. 한국 언론이 문제의 심각성을 잘 보도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난달 일본 정부 관계자는 “올해 초와 지금의 일본 정부 분위기는 또 바뀌었다. 지금은 외무성 한국 담당조차 ‘한국과 잘 지내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모두 한국 비판에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지한파 지식인들이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전반적 사회 분위기가 경직되면서 일본 대학에서 근무하는 한국 교수들은 최근 불안감마저 느끼고 있다. 일본 대학에서 강의하는 한국인 교수 C 씨는 “한국인 동료 교수가 다음 학기 수업을 배정받지 못했고 중요 직책에서도 좌천됐다. 한 일본인 교수는 ‘당분간 활동을 자제하고 10월까지 한국에 가 있는 게 어떻겠느냐’는 문자까지 보내왔다”고 서늘해진 기류를 전했다.
도쿄=박형준 lovesong@donga.com·김범석 특파원 / 조유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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