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26일 오전 일본 도쿄 도심에 갑자기 요란한 헬기 소리가 울렸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취임 1주년을 맞아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를 전격 참배했다. 공영 NHK방송은 이를 촬영하기 위해 헬기를 띄웠다. 현직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2006년 8월 15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당시 총리 이후 7년 4개월여 만이었다.
한국과 중국은 강하게 반발했다. 특히 미국도 ‘실망했다(disappointed)’는 공식 반응을 내놓으며 일본을 압박했다. 이후 미일 관계는 급속히 식었다. 첫 총리 시절(2006년 9월∼2007년 9월) 야스쿠니를 참배하지 못한 것을 “통한의 극치”라고 했던 아베 총리는 미국의 ‘실망’ 반응 후 더 이상 야스쿠니를 찾지 않았다.
이는 일본이 미국의 반응을 얼마나 신경 쓰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시라이 사토시(白井聰) 교토세이카대 강사는 지난해 저서 ‘국체론―국화와 성조기’에서 “2차 세계대전 패전 후 일본의 국가 체제는 일왕이 아니라 미국 중심으로 바뀌었다. 일본은 미국에 종속됐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아베 총리가 최근 한국에 대해 강경 자세로 일관하는 것도 ‘미국의 용인’이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보고 있다. ○ “징용 문제에서 미국은 일본 편”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9일(현지 시간) 워싱턴 백악관에서 기자들에게 “그들(한일)이 서로 잘 지내지 않아 걱정된다. 우리를 매우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중재 의사는 밝히지 않았다. 한일 갈등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직접 중재에 나서지 않되 양국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권장한다’는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놓고 한일이 충돌했던 2014, 2015년 적극 중재에 나섰던 전임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와 완전히 달라진 기류를 보여준다.
우선 일본 정부가 치밀하게 미국을 설득했다. 마이니치신문은 11일 “외무성이 지난해 10월 한국 대법원의 배상 판결이 나온 후 징용 피해자들이 미국 소재 일본 기업의 자산 압류를 신청할 것에 대비한 협의를 미 국무부와 진행했다”고 보도했다. 협의 결과 미 국무부가 작년 말 ‘일본 주장을 지지한다’는 판단을 일본 측에 전달했다고도 전했다.
마이니치에 따르면 미국이 일본 입장을 지지하는 이유는 한일 청구권협정의 예외를 인정하면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정한 ‘전쟁 청구권 포기’ 원칙이 흔들릴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받아들이면 미국이 다른 전쟁과 관련한 사안으로 배상 청구 소송에 연계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미 정부, 주요 싱크탱크, 의회를 상대로 한 일본의 강한 로비력도 한국의 여론전에 불리한 요소다. 일본 외무성이 집행하는 지원금 및 기업들의 직간접 투자까지 포함한 로비 금액은 한국의 최소 10배를 넘어선다는 게 현지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 ‘인도태평양 전략’ 통한 일본 재무장
트럼프 행정부는 동아시아에서 일본, 호주, 인도를 엮은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FOIP) 전략’을 통해 중국과 맞서겠다는 전략에 집중하고 있다. 과거 미 정부만큼 한미일 3각 협력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지 않고 있다. 또 사업가 출신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비용 등을 이유로 해외 주둔 미군 축소를 줄곧 주창해왔다. 비용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일본이 더 큰 역할을 해주기를 노골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군대를 보유하거나 전쟁을 할 수 있는 소위 ‘보통국가’를 지향하는 아베 총리 또한 미 정부의 이런 기류에 적극 화답하고 있다. 과거 일본 자위대는 미일 동맹에 기초해 주로 미군과 훈련했다. 하지만 수년 전부터 영국, 프랑스, 호주, 인도 등과도 공동 훈련을 하고 있다. F-35A 스텔스 전투기, 대형 무인헬기 등 최신형 무기도 대량 구매하고 있다. 아베 2차 내각이 출범한 2012년 말 이후 일본 방위예산은 꾸준히 늘고 있다.
일본은 2014년 7월 미국 등 동맹국이 공격받으면 반격할 수 있는 ‘집단 자위권’을 각의(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다. 장거리 미사일 등 공격용 무기도 계속 보강하고 있다. 미국의 용인과 미일 관계의 밀착 아래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유지하던 ‘전수방위(專守防衛·공격을 받았을 때만 방위력 행사)’ 원칙은 속속 무너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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