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 이코노미 시대 변해야 살아남는다]
<2> 세계로 번지는 ‘저패니피케이션’
침체의 늪에 빠진 지방 도시들
“길거리에서 아이들을 만난 지 오래다. 학교들이 합쳐지고 사라지는 우울한 소식만 들려온다.”
지난달 30일 도쿄 신주쿠에서 기차를 타고 2시간가량 걸려 도착한 도쿄도 외곽 오쿠타마. 지역 토박이 쓰기야마 이치로 씨(75)는 고향에 대해 푸념하며 이같이 말했다. 탄광업과 벌목업으로 먹고살던 오쿠타마에 활력이 줄기 시작한 것은 ‘경제버블’이 꺼지고 난 1990년대 이후부터다. 목재 수요가 줄어들어 지역 경제가 쇠퇴하고 일자리도 줄어들자 젊은층은 도쿄로 떠났다. 1990년 8750명이던 오쿠타마 인구는 지금 5000명 정도로 쪼그라든 상태다. 65세 이상 고령인구가 그중 2500여 명으로 절반에 달한다. 반대로 아이들은 줄어 이곳 중학교 2곳 중 1곳이 문을 닫았고 고등학교는 아예 없다. 오쿠타마 청년정착추진과 직원 쓰루마키 씨는 “오쿠타마 전체 주택 2500여 채 중 488채가 빈집”이라고 말했다. 오쿠타마를 포함해 일본 전체의 빈집 수는 2003년 659만 채에서 지난해 1078만 채로 불어났다.
경제성장률과 물가상승률, 금리가 0(제로)에 수렴하는 제로 이코노미가 지구촌을 휩쓸면서 일본식 장기 저성장 구조인 저패니피케이션(Japanification·일본화)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유럽을 중심으로 미국 등 많은 선진국들에선 제2, 제3의 오쿠타마가 생겨나는 중이다.
○ 지방을 먼저 덮친 저패니피케이션
프랑스 북서쪽 시골마을 포트 브리예. 경기 둔화로 지역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최근 이 마을에 있던 마지막 카페가 문을 닫았다. 이 마을 사람들은 “카페가 없어지다 보니 마을이 거의 죽은 것 같다”는 말을 한다. 프랑스 정부에 따르면 1970년대 20만 개에 달하던 카페는 4만 개로 급감했다. 지역경제가 붕괴수준에 들어가자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문을 닫거나 경영난에 시달리는 지역 카페들을 살리기 위해 1억5000만 유로(약 1940억 원)를 지원하기로 했다.
지난달 10일 프랑스 서부 페이드라루아르 지역에 위치한 도시 라로슈쉬르용에서는 노동자들이 타이어를 태우는 시위를 벌였다. 프랑스의 국민기업으로 불리며 지역민 2만 명을 고용하고 있던 미쉐린 타이어 공장이 폐쇄 결정을 내린 데 대한 항의였다. 플로랑 메네고 미쉐린 최고경영자(CEO)는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역 공장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시장 상황이 허용하지 않았다”고 하소연했다.
한때 호황을 누렸던 유럽 지방의 성장 엔진은 주력산업이 쇠락하고 동네 주민들이 떠나가면서 차갑게 식어가고 있다. 기업들이 싼 인건비를 찾아 터키, 인도, 중국 등으로 공장을 옮기며 일자리가 줄어서 생긴 현상이다. 새로운 기업이 투자를 하고 신산업이 살아나야 하지만 글로벌 경제가 동반 침체에 접어든 지금은 쉽지 않은 일이다.
고령화 또한 저패니피케이션의 원인이다. 65세 이상 인구를 0∼14세 인구로 나눈 비율인 노령화지수는 미국과 독일, 영국이 2000년부터 2040년까지 2배 안팎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이된다. 일본은행 부총재를 지낸 바 있는 니시무라 기요히코 도쿄대학원 교수는 “일본화는 전 세계적으로 불가피한 현상으로, 인구구조 변화에 기인하고 있어 미국과 유럽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이미 마이너스 금리에 접어든 유럽과 달리 미국은 아직 성장률과 금리가 높은 수준이지만 최근 경기 둔화로 제로금리의 필요성이 거론되는 등 ‘J(저패니피케이션)의 공포’가 머지않았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 탈출구 없는 ‘J의 공포’
각국은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그러나 급속한 저패니피케이션을 피할 만한 뚜렷한 대응 수단이 없다는 게 문제다. 금융연구원은 11일 보고서에서 “세계 각국 정책입안자들은 한목소리로 일본화에 진입하게 되면 경기부양 수단이 없을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일본도 통화완화 등 거친 부양책으로만 이 문제를 해결하려다 오히려 장기침체가 더 깊숙하게 뿌리내리는 부작용을 낳았다. 산업혁명 시대에 맞는 과감한 구조 개혁이 없이 고령화와 디플레이션을 상대한 게 일본화의 탈출을 어렵게 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일본이 도입한 마이너스 금리 정책은 오히려 금융회사 수익성만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결과 일본 지방은행은 수년째 계속된 수익 감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中 고속발전 도시들에도‘마이너스 성장’ 그림자 ▼
취저우, 올 상반기 성장률 ―0.37%… 고령화 탓 유효수요 증가율 하락 사람 살지않는 유령도시도 50여곳
세계 경제를 덮치고 있는 저패니피케이션 현상은 높은 경제성장률과 물가상승률을 보여 온 일부 신흥국에도 전염되고 있다. ‘글로벌 경제의 성장엔진’으로 불렸던 중국도 지역과 산업별로 그 전조가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지방 소도시 중에는 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인구가 유출되는 곳이 적지 않다. 초기 개혁개방의 수혜 지역인 저장(浙江)성의 취저우(衢州)는 올해 상반기 경제성장률이 ―0.37%였다. 광산 자원이 풍부해 한때 고속 성장을 거듭했지만 글로벌 경기 둔화와 자원 고갈 등으로 주요 산업인 화학 원료 및 제품 제조업이 무너졌다. 현지 매체에 따르면 전체 인구(2017년 257만 명)의 17%인 45만 명이 올해 취저우를 떠났다.
물론 베이징, 상하이 등 이른바 ‘1선 도시’는 집값 상승세가 지속되고 있지만 취저우처럼 수요 부족에 시달리는 지방 도시가 한두 곳이 아니다. 현지 매체에 따르면 중국 전역에 사람이 살지 않는 ‘유령도시’는 50여 곳에 이른다. 아파트를 지어 분양까지 마쳤지만 들어올 사람이 없는 탓이다. 신도시 인프라 건설을 부담한 지방정부의 동반 부실도 예고된 상태다. 지방정부의 부실은 국영은행의 부실로 전이된다.
물가 추이도 심상치 않다. 9월 중국의 생산자물가지수는 1년 전보다 1.2% 하락해 7월부터 3개월 연속 마이너스를 보였다. 생산자물가는 경기 선행지표로 인식되기 때문에 마이너스 기간이 길어지는 것은 통상 디플레이션의 전조로 해석된다. 중국 역시 ‘구조적 장기 침체’에 대한 우려가 남의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내년 중국의 경제성장률은 심리적 마지노선으로 여겨져 온 6.0% 아래로 내려갈 가능성이 크다. 이미 올해 3분기(7∼9월) 성장률이 27년 만에 가장 낮은 6.0%에 턱걸이했다.
중국의 성장 둔화는 △경제구조 고도화로 고속성장에서 중속(中速)성장 구간으로 진입 △고령화 등으로 중국 내 유효수요 증가율 하락 △미중 무역전쟁의 장기화로 인한 타격 등이 1차적인 원인이다. 여기에 구미 선진국의 경기 침체로 미국을 대신할 수출 지역이 제한돼 있고,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재정·통화정책을 추가로 동원하는 데도 한계를 보이고 있다. 선진국 시장의 부진이 개발도상국으로 전이되는 경로에서 중국도 예외가 아닌 것이다.
:: 저패니피케이션(Japanification·일본화) ::
경제 구조가 일본처럼 장기 불황형으로 바뀌는 상황을 말한다. 저성장, 고령화, 디플레이션의 결과로 경제 활력 저하, 국가 부채 증가, 지방 도시 공동화, 미약한 내수 등의 모습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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