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스캔들에 대한 의회 공개청문회가 11월 13일(현지시각) 시작됐다. 관련 외신을 보면 핵심 키워드로 ‘퀴드 프로 쿼(Quid pro quo)’라는 라틴어 표현이 등장한다. 트럼프 대통령도 트위터나 기자회견에서 이 라틴어 표현을 되풀이해 사용했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이 때문에 ‘퀴드 프로 쿼가 뭐길래’라는 별도의 기사를 쓰기도 했다.
‘퀴드 프로 쿼’의 문자 그대로 뜻은 ‘뭔가에 해당하는 뭔가(what for what)’다. 누군가 뭔가를 가져오면 그에 걸맞은 뭔가를 내놓는다는 의미다. 뜻만 놓고 보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에 해당하는 영어숙어 ‘팃 포 탯(tit for tat)’을 연상케 한다. ‘받은 만큼 돌려준다’는 뜻은 같지만 ‘팃 포 탯’이 주로 보복, 앙갚음을 의미할 때가 많은 반면, ‘퀴드 프로 쿼’는 혜택받은 것에 대한 대가 지불을 의미한다. 우리 속담 가운데 ‘가는 정이 있어야 오는 정이 있다’에 해당한다고나 할까.
이와 비슷한 또 다른 라틴어 표현이 있다. ‘도 우트 데스(Do ut des)’다. 직역하면 ‘네가 주니까 내가 준다’는 뜻이다. 영어 ‘기브 앤드 테이크(give and take)’에 해당하는 표현이다. 상호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퀴드 프로 쿼’와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법률용어로 쓰일 경우 ‘도 우트 데스’는 계약 이행에서 상호성(相互性)이라는 중립적 뜻으로 쓰이는 반면, ‘퀴드 프로 쿼’는 정당성이 결여된 거래에서 대가성(代價性)이라는 부정적 의미가 강하다.
우크라이나 스캔들은 7월 25일 트럼프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간 전화통화 내용이 두 달 뒤 내부고발을 통해 공개되면서 불거졌다.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정적이자 민주당의 유력 대선주자였던 조 바이든 전 부통령 부자(父子)의 우크라이나 에너지업체 비리 연루 의혹을 조사해달라고 요청하면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미국의 군사 지원을 함께 언급한 점이 드러난 것이다.
○ ‘퀴드 프로 쿼’와 ‘도 우트 데스’
우크라이나는 2014년 크림반도를 무력으로 빼앗긴 이래 러시아의 군사 위협에 시달려왔기에 미국의 군사 원조가 절실한 상황. 따라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바이든 부자에 대한 조사와 군사 지원을 연계하겠다는 암시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어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정부에 바이든 부자 수사를 압박하며 우크라이나 군사 원조를 보류하라고 지시했다는 백악관과 국무부 관계자들의 증언이 쏟아졌다.
민주당이 다수인 미 하원에선 정략적 이익을 위해 외교·안보정책을 악용한 것이 미국 헌법에서 대통령 탄핵 사유로 제시한 ‘뇌물, 반역, 중범죄’에 해당할 수 있다며 9월 24일부터 진행된 비공개 조사를 11월 13일부터 공개청문회로 전환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그가 속한 공화당 관계자들은 이에 맞서 ‘대가성은 없다(No quid pro quo)’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했다. 바이든 부자에 대한 조사를 요구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군사 원조와 연계하려 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어려운 라틴어 표현을 들고 나왔을까. 일부러 난해한 법률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이번 사태가 매우 복잡하고 지루한 공방전이 될 것이라는 인상을 심어줘 국민의 관심을 딴 곳으로 돌리려는 책략일 개연성이 높다. 민주당이 공개청문회에서 강요(extortion)나 뇌물수수(bribery)처럼 쉽고 명료한 단어를 쓰기로 한 것 역시 그런 술책에 대한 맞대응으로 보인다.
사실 리얼리티쇼를 통해 대중스타가 된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주요 지지층인 백인 중하층이 이해하기 쉬운 명쾌한 영어를 구사한다. 그에 반해 한국의 사자성어에 해당하는 라틴숙어는 교육 수준이 높은 중상층이 글을 쓸 때 주로 인용한다. 특히 로마법의 영향이 막강한 법률용어 외에도 로마제국 운용 과정에서 파생된 외교안보용어, 그리고 라틴어 문학작품에서 기원한 문학용어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분야별로 자주 사용되는 라틴숙어를 짚어보자.
국제정치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라틴숙어는 아마도 ‘현상유지’를 뜻하는 ‘스테이터스 쿼(Status quo)’일 것이다. 이 표현은 약어다. 원래는 ‘인 스테이투 쿼 레스 에란트 안테 벨룸(in statu quo res erant ante bellum)’이다. ‘전쟁 이전에 만물이 있던 상태’라는 뜻이다. 전쟁 내지 분쟁이 발발하기 전의 평화롭고 안전한 상태를 말한다.
○ ‘스테이터스 쿼’ ‘파라 벨룸’ ‘모두스 비벤디’
현실주의 국제정치 이론가로 유명한 한스 모겐소는 고전적 현실주의에 입각한 3개의 대외정책으로 국력의 확장을 시도하는 제국주의정책, 국가의 힘을 과시해 위신을 유지하려는 위신정책과 더불어 현상유지정책(스테이터스 쿼)을 꼽았다. 현실주의의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정치에서 평화는 패권국가 간 세력균형을 통해 이뤄지는데, 그 구체적인 대외정책은 결국 현상유지밖에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액션영화 ‘존 윅 3’의 부제로 쓰인 ‘파라 벨룸(Para bellum)’ 역시 라틴숙어다.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뜻으로 ‘시 비스 파켐, 파라 벨룸(Si vis pacem, para bellum)’에서 나온 약어다. 기원전 4~5세기 무렵 로마 귀족 푸블리우스 플라비우스 베게티우스 레나투스의 ‘군사학 논고’에 등장한 표현을 후대에 가다듬은 것이다.
파라 벨룸은 1901년 독일 루거 P08 권총 설계자인 오스트리아 출신의 게오르크 루거가 설계하고 독일 무기회사 DWM에서 생산한 직경 9mm 탄환 총알의 상표명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독일 총알의 표준제품으로, 1985년까지 직경 11mm 탄환을 사용하던 미군이 이 탄환을 사용하는 이탈리아산 권총을 제식권총으로 채택하면서 권총과 기관단총의 세계 표준이 됐다.
외교안보용어로 쓰이는 라틴숙어 가운데 가장 심오한 것은 아마도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일 것이다. 분쟁 중인 당사자 간 평화 공존을 위한 ‘잠정협정’을 뜻한다. 공식적이고 영구적인 협정으로 대체되기 전 임시방편의 합의로 이뤄지기 때문에 의회 비준이 필요하지 않고 형식도 자유롭다.
하지만 이 표현의 원뜻은 ‘생활방식’ 내지 ‘라이프스타일’이다. 세상에 다양한 사람이 존재하는 만큼 모두스 비벤디 역시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사상과 신념이 다른 사람들 간 분쟁을 막기 위해 암묵적인 최소한의 신사협정이 필요해지면서 이를 ‘모두스 비벤디’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현대사회를 모든 것이 유동적이라는 점에서 액체사회로 규정한 폴란드 출신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원주민과 외부에서 유입된 이주노동자 내지 난민 간 잠정협정이라는 의미로 ‘모두스 비벤디’라는 개념을 쓴다. 하지만 이는 원주민의 변덕에 의해 언제든 파기될 수 있다는 점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수반해 묵시론적 ‘모두스 비벤디’이기도 하다.
○ ‘카르페 디엠’ ‘메멘토 모리’ ‘둠 스피로 스페로’
문학적 표현 가운데 가장 유명한 라틴숙어는 아마도 ‘카르페 디엠(Carpe diem)’일 것이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통해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이 표현은 ‘오늘을 붙잡으라’는 뜻이다. 기원전 1세기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가 쓴 농사에 대한 송가의 마지막 구절 ‘카르페 디엠, 쾀 미니뭄 크레둘라 포스테로(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를 함축한 표현이다. ‘오늘을 붙잡게, 내일이라는 말은 최소한만 믿고’로 번역된다.
이후 카르페 디엠은 르네상스 이후 유럽에서 ‘지나간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지 말며 현재에 충실하라’는 뜻으로 널리 인용돼 유명해졌다. 17세기 영국 시인 앤드루 마블의 시 ‘수줍은 여인에게(To His Coy Mistress)’가 대표적이다. 수줍은 여인에게 인생은 유한하니 젊을 때 사랑을 속삭이자는 내용이다. 이는 ‘YOLO(You Only Live Once)’라는 영어약자 표현으로 변형돼 오늘까지 면면히 계승되고 있다.
이와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라틴숙어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이 표현은 미래에 맞닥뜨리게 될 죽음을 망각하고 오직 오늘만 살려는 세태를 향한 묵직한 경고 목소리다.
옛날 로마에서는 원정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장군이 개선행진을 할 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이 말을 외치게 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너무 우쭐대지 마라,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걸 잊지 말고 겸손하게 처신하라’는 경계의 의미를 담아서.
국내에서 이런 라틴숙어의 확장은 2017년 출간된 ‘라틴어 수업’의 영향이 크다. 교황청 대법원인 로타 로마나의 3년 과정 사법연수원을 통과한 아시아 최초 변호사 한동일 씨가 쓴 이 책을 통해 라틴어가 지배적이던 로마제국과 중세 유럽의 온축된 지혜가 깊이 있게 음미되기 시작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뜻인 ‘혹 쿠오퀘 트란시비트(Hoc quoque transibit)’나 ‘당신의 안녕이 곧 나의 안녕’이라는 뜻인 ‘시 발레스 베네, 발레오(Si vales bene, valeo)’는 언론에서도 여러 번 인용됐다. 그러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 2위를 다투고 사회안전망이 미비해 영혼을 잠식하는 불안이 일상화된 한국 사회에 진짜 필요한 라틴숙어는 ‘둠 스피로 스페로(Dum Spiro Spero)’일지도 모른다. ‘숨 쉬는 동안 나는 희망한다’는 뜻이다. 당신이 지금 어디서 얼마나 힘겨운 삶을 버티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살아 있다면 제발 희망을 포기하지 말길 바라는 뜻에서 이 말을 해리 포터가 하는 마법의 주문처럼 다시 외워본다. ‘둠 스피로 스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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