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그를 떠나자, 그녀가 살해됐다”… 전세계 페미사이드 공포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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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데이트폭력’ 여성 피해자 급증

“사진 속 여성 ○○는 배우자나 애인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지난달 23일 프랑스 파리 중심가 오페라극장 앞이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약 5만 명의 시민이 보라색 깃발과 플래카드를 들고 모였다. 참가자 대부분은 일반인으로 보이는 몇몇 여성의 얼굴 사진을 들었다. 일부는 이 여성들의 이름을 외치면서 절규했다.

이 여성들은 페미사이드(femicide), 즉 여성을 상대로 자행된 강력 살인의 희생자들이다. 파리 시민들은 “여자를 깨부수지 말고 침묵을 부숴라” “여성폭력이 심각하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다. 일부는 희생자의 피를 상징하는 붉은색 물감을 옷에 묻힌 채 도로에 드러누웠다. 집회를 주최한 단체 ‘우리 모두(NousToutes)’에 따르면 이날 프랑스 30여 개 주요 도시에서 총 15만 명이 행진에 참여했다. 젠더 폭력을 규탄하는 시위 중 역대 최대 규모다.

최근 세계 각국에서 페미사이드로 인한 피해자가 급증하고 있다. 피해자 일부는 지속적 폭력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극단적 선택까지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가는 페미사이드 범죄를 예방하지도 못하고, 범죄자를 제대로 처벌하는 일에도 소홀해 사태를 더 악화시키고 있다.

○ 빠르게 늘어나는 희생자

페미사이드는 ‘여성(Female)’과 ‘살해(Homicide)’의 합성어다. 미국 캘리포니아 오클랜드 소재 밀스 칼리지의 다이애나 러셀 교수가 1976년 여성 대상 범죄 국제재판소에서 처음 사용했다. 러셀 교수는 1992년 출간한 동명의 저서에서도 “페미사이드는 역사적으로 불평등한 남녀의 권력관계에서 기원했다. 여성에 대한 증오, 경멸, 쾌락, 소유욕 등이 동기가 되어 남성이 자행한 여성혐오적 살해”라고 정의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페미사이드를 ‘여성이라는 이유로 연애 상대, 동거인, 배우자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으로 정의하고 있다. 최근에는 물리적 폭행과 살인을 넘어 여성에 대한 심리적 학대,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 관습으로 개인이 피해를 입는 사례를 포함할 정도로 그 개념이 확대됐다.

가디언 등 언론에 따르면 올해 프랑스의 페미사이드 희생자는 116명에 이른다. 사흘에 1명꼴이다. 파리 집회 이틀 후인 지난달 25일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이를 거론하며 “프랑스의 수치”라고 개탄했을 정도다. 이탈리아에서도 지난해 142명, 올해 100명의 여성이 각각 숨졌다. 독일에서도 올해 119명이 희생됐다.

유럽연합(EU) 통계당국 ‘유로스타트’에 따르면 인구 10만 명당 가정폭력 등으로 목숨을 잃는 여성의 수는 루마니아 0.43명, 핀란드 0.36명, 독일 0.23명, 프랑스 0.18명, 스페인 0.12명, 이탈리아 0.11명에 달한다. 서유럽에 비해 경제가 낙후되고 여성 인권 개념이 약한 동유럽에서 이 수치가 특히 높다.

중남미의 사정은 더 열악하다. 멕시코에선 지난해 3750명, 하루에 약 10명꼴로 페미사이드 사망자가 발생했다. 특히 지난달 25일 49세 여성 아브릴 페레스는 14, 16세 두 자녀가 보는 앞에서 괴한들의 총에 맞아 숨졌다. 이 괴한들은 가정폭력 혐의로 감옥에 갔다가 가석방된 남편이 고용한 청부업자로 알려져 전국이 큰 충격에 휩싸였다.


○ 세계로 번진 ‘페미사이드’ 규탄

피해자 급증으로 11월 한 달간 유럽 각국에서는 잇따라 페미사이드 규탄 집회가 열렸다. 파리 시위가 벌어졌던 날과 같은 날 이탈리아 로마에서도 비슷한 집회가 개최됐다. 수천 명의 로마 시민이 “더 이상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이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자”며 희생자들의 이름을 부르며 행진했다.

하루 뒤 벨기에 브뤼셀 도심 곳곳에는 ‘빨간색 구두’가 놓였다. 붉은 신발은 가정, 데이트폭력으로 흘린 여성들의 피를 의미한다. 브뤼셀 시민 1만여 명도 “그녀가 그를 떠나자, 그가 그녀를 죽였다”를 외치며 행진했다. 이틀 후 독일 베를린에서도 남성 가해자의 처벌 강화를 요구하는 집회가 개최됐다.

지난달 23일 프랑스 파리에서 여성에게 자행되는 각종 강력 범죄를 규탄하는 반(反)페미사이드 시위가 열렸다. 시위대가 남편에게 살해된 여성들의 이름이 적힌 대형 보라색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파리=AP 뉴시스
지난달 23일 프랑스 파리에서 여성에게 자행되는 각종 강력 범죄를 규탄하는 반(反)페미사이드 시위가 열렸다. 시위대가 남편에게 살해된 여성들의 이름이 적힌 대형 보라색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파리=AP 뉴시스
지난달 25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집회는 단순한 페미사이드 반대, 가해자 처벌 강화가 아니라 극우정당 ‘복스’를 겨냥한 행사였다. 지난달 스페인 총선에서 집권 사회당, 제1 야당 국민당에 이어 일약 제3당으로 부상한 복스는 극단적인 반(反)페미니즘, 반난민, 반무슬림을 외친다. 이들은 가정폭력을 저지른 남성들에 대한 처벌에도 반대한다. 지난달에는 유엔이 정한 ‘세계 여성폭력 추방의 날’을 맞아 각 정당이 동참한 선언문 서명도 거부할 정도로 여성혐오 성향이 짙다.

하비에르 오르테가 복스 사무총장은 당시 “세상에는 여자에게 맞는 남자들도 있고, 아내에게 죽임을 당하는 남편들도 있다”고 주장해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이날 복스 규탄 집회에 참가한 수천 명의 시민들은 “얼마나 많은 여성이 죽어야 하느냐”고 일갈했다.

올해 6월부터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도 여성혐오 범죄에 항의하는 시위가 수시로 펼쳐지고 있다. 영국에서는 6월부터 경찰들이 배우자의 위협에 시달리는 여성들에게 정당방위를 행사할 수 있도록 뭉툭한 부엌칼을 배부하고 나섰다.


○ 원인은 솜방망이 처벌

유엔에 따르면 세계 여성 8만7000명 중 17%가 최근 1년간 현재 혹은 이전의 배우자나 애인으로부터 폭력을 경험했다. WHO 조사에서도 전 세계 여성의 35%, 3명 중 1명이 배우자의 폭력에 노출되고 있었다.

과거보다 인권과 여성의 지위가 전반적으로 향상됐음에도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특히 독일, 프랑스 등 세계 최고 선진국에서조차 페미사이드가 빈번한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가해자에 대한 공권력의 허술한 법 집행과 솜방망이 처벌이다. 미 뉴욕타임스(NYT)가 소개한 프랑스 여성 쥘리 두이브 씨(34)의 사연을 보자. 두 자녀를 둔 그는 지난해 10월 가정폭력을 이유로 남편과 별거를 시작했다. 남편은 양육권을 포기하라며 집요하게 위협했다. 두려움을 느낀 두이브 씨는 10번 이상 경찰에 도움을 청했다. 특히 총기 면허증을 가진 남편이 종종 총을 겨누자 당국에 ‘남편의 총기 허가를 취소해 달라’고도 요청했다. 하지만 경찰은 집안 문제는 사적인 해결이 우선이라며 제대로 대처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올해 3월 남편이 쏜 총에 가슴과 팔을 맞고 숨졌다.

이처럼 폭력을 당한 여성이 경찰에 신고해도 상당수는 ‘가정을 지켜라’ ‘남녀 문제는 각자 알아서 하라’며 대처하지 않았다. 설사 재판에 넘겨진다 해도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가해자의 해명, 초범이라는 이유 등으로 터무니없이 낮은 형량이 선고된다. 사실상 처벌이 없으니 가해자는 더 큰 폭력을 휘두르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 과정에서 피해 여성에 대한 폭력이 일상화되고 살인이라는 끔찍한 결말로 귀결되기도 한다. 페미사이드를 ‘묻지 마 살인’ ‘무차별 살인’ 등으로 명명하는 행위 또한 사안의 중대성을 의도적으로 낮춰 평가한 발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가해자들은 무작위로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여성을 겨냥했기 때문이다.

올해 9월 한 프랑스 여성은 경찰의 긴급 콜센터에 “남편이 나를 죽이려 한다”고 신고했다. 하지만 이 전화를 받은 경찰관이 도와 달라는 요청을 거부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파문이 일었다.


○ 극우 득세 + 미투 반발 등도 영향


난민 증가, 미국의 일방주의 등으로 세계 곳곳에서 극우주의 성향이 강화되고 소위 권위주의 지도자 ‘스트롱맨’이 득세하는 현상 또한 페미사이드 확산의 또 다른 요인으로 꼽힌다. 스페인뿐 아니라 최근 러시아, 헝가리, 폴란드 등 동유럽에서는 극우 민족주의를 앞세운 지도자와 스트롱맨이 득세하면서 성평등 지수가 하락하고 여성혐오 범죄가 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19년간 집권 중인 러시아에서는 2017년부터 가정폭력 처벌이 오히려 완화됐다. 당국은 “부부 다툼을 폭력으로 몰아붙이는 건 급진적 페미니즘의 폐해”라고 주장하며 이런 조치를 단행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16년간 집권하고 있는 터키의 사정도 비슷하다. 터키 정부는 2016년 이혼율 급증을 막기 위해 가족보호 정책을 내놨다. 하지만 해당 정책에는 배우자에게 폭력을 당한 여성을 다른 장소가 아닌 가정으로 복귀시키는 내용이 포함됐다. 페미사이드가 가장 많이 일어나는 장소가 ‘피해자의 집’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해하기 어려운 처사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최근 2, 3년간 급격히 확산된 여성들의 성폭력 고발 운동 ‘미투(#Me Too·나도 당했다)’에 따른 남성들의 집단 반발 심리가 여성에 대한 폭력을 오히려 더 도드라져 보이게 만들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폭력을 당해도 쉬쉬하던 피해자가 미투 운동의 확산으로 자신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공개함에 따라 페미사이드 피해자의 사례가 더 많이, 더 널리 주목받고 있다는 의미다. 고미경 ‘한국여성의전화’ 대표는 “미투 운동에 반감을 가지고 이를 여성혐오로 연결하는 남성이 늘고 있다. 자본주의가 극도로 발전하면서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여기고 이를 상품화하는 경향이 강화된 것도 여성폭력 증가에 영향을 미쳤다”고 진단했다.


○ 아직은 미흡한 대책


프랑스 정부는 지난달 말 페미사이드 종합 대책을 내놨다. 이 대책에는 아내, 여자친구, 동거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남성에게 접근금지용 전자발찌를 착용하도록 하고, 의사가 가정폭력이나 데이트폭력 피해 징후가 보이는 여성을 환자로 만났을 때 곧바로 당국에 신고할 수 있도록 현행 의료법을 개정하는 내용이 담겼다. 그간 개인정보 유출, 가해자인 남편의 반발 등을 이유로 폭력 신고를 꺼리던 의사들이 적지 않았음을 반영한 처사다. 욕설이나 언어폭력 등도 심리적 학대로 보고 처벌하기로 했다. 이탈리아 정부도 페미사이드 희생자 가족을 위해 1200만 유로(약 156억 원)를 우선 지원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지적이 나온다. 가해자에 대한 강력 처벌, 사회 전체의 피해자 보호 노력, 여성 인권 강화, 조기 교육 등이 선행되지 않으면 ‘사후약방문’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2016년 5월 서울지하철 2호선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 건물 화장실에서 발생한 여성 살해 사건의 기억이 생생한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아직 한국에는 젠더 폭력과 페미사이드에 관한 기본 통계조차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선진국이라고 여성 대상 폭력이 적은 것도, 가해자와 피해자가 고학력 부유층이라고 범죄가 발생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남성 중심 문화에서는 어느 사회, 어느 계층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공적 영역에 남녀 동수 비율 적용을 확대하는 등 여성 입장과 관점에서 폭력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파리=김윤종 특파원 zozo@donga.com
#페미사이드#젠더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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