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무역분쟁의 최고재판소 역할을 해 온 세계무역기구(WTO) 상소기구가 11일 0시(현지시간)부로 완전히 마비됐다. 자국 우선주의와 보호주의를 앞세운 미국의 보이콧 때문이다. WTO 최종심 격인 상소기구의 기능이 정지된 것은 1995년 출범 이후 처음이다.
아사히신문·AFP통신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호베르투 아제베두 WTO 사무총장은 이날 상소기구 기능정지를 몇 시간 앞둔 10일 저녁 WTO 본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내일(11일)부터 WTO는 새로운 분쟁에 대해 심리할 수 없게 됐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그는 “상소기구 기능 정지로 WTO 무역분쟁 해결이 끝나는 게 아니다. 회원국들 사이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며 미국과의 협의를 서두르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번 사태는 상소기구 판단에 불만을 가진 미국이 지난 2년간 임기가 만료된 상소위원 후임 선출을 막으면서 불거졌다. 7명이 정원인 WTO 상소위원은 164개 회원국의 만장일치로 선임해야 한다. 그런데도 미국은 ‘상소기구의 판결이 미국의 이익을 침해한다’며 상소위원 임명에 동의해주지 않았다. 그 결과 WTO는 재판부 구성에 필요한 최소 인원인 3인으로만 최종심리를 해왔다.
10일 상소위원 2인의 임기마저 종료되자, WTO는 상소기구 부재를 막기 위해 9일부터 사흘 일정으로 일반이사회를 열고 해법을 모색해왔다.
WTO는 현재 상소 기구에 계류 중인 무역 분쟁 가운데 심리 절차가 시작된 3건만이라도 결론을 내자고 제안했으나, 미국의 거부로 이마저도 무산됐고 예정보다 하루 일찍 회의가 종료됐다.
결국 WTO는 24년 만에 셧다운(일시적인 업무정지 상태)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맞게 됐다.
대(對)한국 수출 규제를 둘러싼 한일 WTO 분쟁에도 영향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해당 사안은 지난달 22일 우리 정부의 제소 절차 중단으로 임시 봉합된 상태지만, 갈등이 재연될 경우 1심 소위원회에 회부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일본 정부가 판단에 불복하려고 해도 상소기구가 마비된 상태라 사안이 공중에 붕 떠버린다는 게 일본 측 주장이다.
아사히는 “WTO 상소기구 기능 정지에 따라 상대국의 부당한 조치를 철회하는 게 어려워졌다”면서 “일본이 후쿠시마 주변산 수산물 수입금지 조치와 관련 한국에 역전패당한 쓰라린 경험이 있어 미국과 함께 상소기구의 재판 기능 강화에는 난색을 표하고 있다”고 전했다.
WTO의 위기는 2017년 보호무역주의를 앞세운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예견된 일이었다. 그동안 트럼프 행정부는 WTO가 ‘미국 우선주의’에 걸림돌로 작용한다고 보고, 상소위원 선임이나 연임을 보이콧하는 등 상소기구를 고사시키는 전략을 펴왔다. 특히 미국은 WTO가 2001년에 가입한 중국의 불공정한 무역 관행을 묵과하고 있다는 비판을 지속해왔다.
각국 정부에 다자간 무역협정의 근간인 WTO가 사라지면 각국이 사생결단식 무역전쟁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이와 관련 필 호건 유럽연합(EU) 무역담당 집행위원은 앞서 유럽의회에서 “WTO는 출범 이래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면서 “(무역에) 정글의 법칙이 적용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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