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언론의 취재와 대중문화 행사를 거의 허용하지 않아 ‘은둔의 왕국’으로 불렸던 사우디아라비아가 미디어 산업 육성에 눈을 돌리고 있다. 이달 2, 3일 사우디 수도 리야드의 힐턴호텔에서는 사우디 최초의 국제 언론 행사 ‘사우디 미디어 포럼(SMF)’이 열렸다. 각국 언론의 중동 문제 보도 실태와 미디어 산업의 미래를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처음 열린 행사였지만 세계 언론의 관심은 뜨거웠다. 동아일보를 포함해 미국 블룸버그뉴스와 CNBC, 영국 가디언과 스카이뉴스, 프랑스 르피가로, 유럽 EPA통신 관계자들이 발표자와 패널로 참석했다. 트위터, 유튜브, 페이스북 같은 대형 소셜미디어도 행사장에 대형 홍보공간을 마련했다. 사이드 알감디 킹사우드대 언론학과 교수는 기자에게 “몇 년 전만 해도 사우디에서 이렇게 큰 규모의 언론 행사가 열릴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정부 차원의 미디어 산업 육성 움직임이 본격화했다”고 말했다.
사우디에는 최근까지도 카타르 알자지라처럼 해외에 알려진 유명한 언론사도 없었다. 무엇보다 왕실을 비판하는 사람은 극형에 처해질 정도로 언론 자유가 전무한 것으로 유명했다. 지난해 10월 피살된 반정부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의 살해 배후에 왕실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된 점만 봐도 사우디의 언론 현실이 어떤지 잘 알 수 있다. 과연 사우디 정부는 무엇을 기대하고 미디어 산업 육성에 나섰을까.
○ 아람코 상장에 따른 국가 이미지 개선
세계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는 막대한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아랍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하지만 미디어 분야에선 별다른 경쟁력을 보이지 못했다. 이웃 카타르와 아랍에미리트(UAE)보다 ‘몇 수 아래’라는 평가가 많았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우디도 정부 차원에서 종합방송사인 MBC, 뉴스전문 채널인 알아라비야를 설립했다. 하지만 알자지라만큼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 데 실패했다. 특히 지난해 카슈끄지 피살 사건은 국가 이미지에 치명타를 안겼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 최대 석유기업인 국영 석유사 아람코가 이달 11일 리야드 타다울 증권거래소에서 주식 거래를 시작했다. 5일 기업공개(IPO) 당시 아람코 1주는 32리얄로 책정됐지만 거래 첫날인 이날 상한가 10%까지 오르며 주당 35.2리얄(약 1만1200원)로 뛰었다. 12일 현재 아람코의 기업 가치도 약 1조9600억 달러로 불어나 사우디의 목표치인 2조 달러에 거의 근접했다. 기존 세계 1위였던 미국 애플의 시가총액 약 1조3000억 달러를 가뿐히 넘어섰다.
사우디는 아람코 상장 자금으로 탈(脫)석유와 산업 다각화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려 하고 있다. 당초 100% 왕실이 보유한 전체 지분 중 5%를 매각해 미국 뉴욕 및 영국 런던 증권거래소 등에도 상장하려 했지만 공모가에 대한 이견 등으로 해외 상장은 일단 잠정 중단됐다. 그 대신 이번에 국내에서만 1.5%의 지분을 풀었다. 하지만 사우디 정부는 반드시 해외 상장을 성공시키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장지향 아산정책연구원 중동센터장은 “아람코 상장, 관광 개방, 해외 기업 투자 유치 등 개혁, 개방에 나서고 있는 사우디로서는 뒤늦게 미디어의 중요성을 느끼고 있을 것”이라며 “해외 언론과의 긍정적인 관계 형성 및 자국 미디어 육성에 공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투르키 알샤바나 공보부 장관도 2일 “나라 안팎으로 더 많은 것을 알릴 필요가 있다”며 해외 언론에 적극 문호를 개방할 뜻을 드러냈다.
○ 산업 다각화에 기여하는 미디어 산업
미디어 산업 육성이 사우디가 공을 들이는 산업 다각화에도 도움이 된다는 지적이 많다. 이미 카타르와 UAE는 1990년대부터 중동의 허브를 지향하며 미디어 산업을 대대적으로 육성해왔다. 1996년 ‘중동의 CNN’으로 불리는 알자지라 방송을 설립한 카타르가 대표적이다. 수도 도하의 교육특구인 ‘에듀케이션시티’에는 미국 미주리대, 컬럼비아대와 함께 ‘최고의 기자 양성소’로 불리는 미 노스웨스턴대 저널리즘스쿨 분교가 있다. 2012년에는 정부 주도로 스포츠 전문채널 비인(BeIN)이 탄생했다. 이 채널은 중동의 ESPN이 되겠다는 야심 찬 목표를 갖고 있다.
UAE 역시 2000년부터 두바이에 일종의 미디어 산업 특구인 ‘미디어시티’를 조성했다. 해외 유명 언론의 중동 지국도 집중 유치했다. 아랍권 언론사 중 상당수도 두바이에 본사를 두고 있다. UAE가 중동에서 가장 개방적인 나라라는 이미지를 얻는 과정에 두바이 미디어시티가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런 이웃 나라들의 성공 사례를 보며 실권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도 미디어 및 콘텐츠 산업 육성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우디가 올해 10월 한국 ‘방탄소년단(BTS)’의 야외공연을 허락하고 지난달 리야드 인근 고대 유적지 디리야에서 세계 헤비급 권투 타이틀전을 연 것도 미디어와 콘텐츠 산업을 활성화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는 분석이 많다.
특히 사우디는 이슬람교의 3대 성지(메카, 메디나, 예루살렘) 중 메카와 메디나를 보유한 나라다. 아랍권, 나아가 이슬람권을 상징하는 나라의 조건을 갖춘 셈이다. 그런 만큼 이슬람교 관련 콘텐츠가 풍부할 수밖에 없다. 이는 사우디에서 제작된 뉴스, 영화, 드라마, 다큐멘터리, 책 등이 이슬람권 전역에서 주목받기에도 용이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올해 9월에는 유럽의 영화 제작진들이 만든 3대 국왕인 파이살 국왕의 어린 시절을 다룬 영화 ‘왕으로 태어나다(Born a King)’의 개봉도 허용했다. 왕실의 일거수일투족을 일반 대중에게 노출하지 않으려 했던 과거 행보와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다.
사우디의 20, 30대 인구 비율이 높고, 최근 정부 차원에서 여성들의 사회 진출 확대를 적극 장려하고 있다는 점도 이와 무관치 않다. 미디어 산업의 특성상 젊은 세대와 여성들의 입김이 세고, 이들을 위한 양질의 일자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알감디 교수는 “정부 차원에서 젊은이들을 위한 미디어 교육 투자를 늘릴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변화와 개혁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 젊은이들로부터 외면당할지 모른다는 우려 역시 사우디의 미디어 산업에 대한 관심에 작용하고 있다.
○ 아직도 멀기만 한 중동의 언론 자유
사우디 정부 차원의 미디어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적지 않다. 21세기에 어울리지 않는 전제군주 체제, 낙후된 인권 등의 문제가 여전한 상황에서 일종의 눈 가리기 도구로 쓰려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과거와 달리 사회 분위기가 개방적으로 변했다고 한들 왕실과 정부를 비판하는 일이 가능하겠느냐는 우려가 있다.
과거 사우디는 터키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인기리에 방영되던 터키 드라마의 방영을 금지했다. 2015년 반정부 인사를 인터뷰했다는 이유로 설립된 지 불과 하루가 지났던 신생 방송사 알아랍도 전격 폐쇄했다. 사우디 내에서는 알자지라도 접할 수 없다. 정부에 비판적인 보도를 자주 해왔다는 이유로 방영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세라 엘리차니 이집트 카이로 아메리칸대 언론학과 교수는 “사우디는 미디어를 이용해 국가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만 관심이 있다. 자유로운 비판까지 허용할 가능성은 낮다”고 전망했다.
사우디보다 훨씬 개방적인 분위기인 카타르와 UAE 언론조차 자국 왕실 및 정부 비판을 좀처럼 못 하고 있다. 특히 2013년 타밈 빈 하마드 알사니 카타르 국왕이 집권한 후 알자지라에서는 정권 비판 보도를 찾아볼 수 없고 ‘정권 홍보’ 보도만 대폭 늘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2017년 6월 사우디, UAE, 바레인 등 수니파 중동 국가들은 카타르가 시아파 이란과 친하게 지낸다는 이유로 카타르와 전격적으로 단교했다. 알자지라는 이후 단교를 주도한 사우디와 UAE를 비판하는 뉴스와 다큐멘터리를 집중 편성해 내보냈다. ‘사우디, UAE, 정부군’ vs ‘이란, 후티 반군’이 대립하고 있는 예멘 내전 소식을 전할 때도 이런 성향이 두드러졌다.
알자지라는 이란과 후티 반군의 소식은 거의 보도하지 않은 채 사우디와 UAE, 정부군의 잘못을 부각하는 뉴스를 집중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특히 사우디와 UAE가 민간인을 오폭하는 상황이 벌어질 때는 거의 예외 없이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관련 뉴스를 속보로 전하고 있다. 모두 왕실과 정부의 의중이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이런 보도 행태가 알자지라의 신뢰도와 시청률 모두를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해 과거의 위상마저 해친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 경제 살리고 이미지 바꾸고… 사우디-카타르-UAE 행사 경쟁 ▼
중동 산유국들 너도나도 “국제포럼 초청합니다”
사우디 매년 사막의 다보스포럼, 카타르는 외교안보 도하포럼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아랍에미리트(UAE) 바레인 등 중동 산유국은 국가 이미지 개선, 경제 활성화 등을 위해 치열한 ‘국제포럼 개최 경쟁’에 나서고 있다.
사우디는 실권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권력을 잡은 2017년부터 매년 ‘사막의 다보스포럼’으로 불리는 ‘미래투자이니셔티브(FII)’를 개최하고 있다. 경제에 방점을 둔 포럼답게 해외 기업들로부터 대규모 투자 유치를 이끌어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2017년 첫 포럼에는 홍해와 인접한 지역에 대규모 메가시티를 개발하겠다는 ‘네옴 프로젝트’가 공개됐다. 올해 10월 말 열린 3회 포럼에는 JP모건, 씨티그룹, 블랙록자산운용, 영국 HSBC 등 세계적 금융사가 대거 참여했다. 아람코 기업공개(IPO)와 상장을 앞둔 시점인 만큼 이들의 참여는 관심을 끌었다. 사우디는 이들 금융사에 수도 리야드에 건설 중인 킹압둘라금융지구(KAFD) 진출 가능성 등을 타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포럼 기간에 사우디를 방문했던 국내 기업 관계자는 “정부 관계자들이 한국 기업의 연구개발(R&D) 시설 유치에 관심을 보였다”고 전했다.
카타르는 2000년부터 외교안보 등을 주제로 한 ‘도하 포럼’을 매년 말에 열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풍요롭지만 수니파 맹주 사우디와 시아파 맹주 이란 사이에 낀 ‘작은 나라’의 고민을 엿볼 수 있는 행사라는 평가가 나온다. 이달 14, 15일 열리는 올해 포럼의 주제도 시리아 사태, 세계 극단주의 확산 등이다.
UAE도 2008년부터 매년 초 ‘아부다비 지속 가능성 주간’이란 경제 포럼을 열고 있다. 지속 가능한 개발을 위한 경제정책 주제들을 주로 다룬다. 최근에는 항공, 사이버보안, 에너지 등 첨단 정보기술(IT) 산업과 과학기술에 초점을 맞춘 포럼도 다수 운영하고 있다. ‘사우디 미디어 포럼’에서 만난 한 유럽 컨설팅사 관계자는 “사우디, 카타르, UAE 모두 뿌리 깊은 경쟁의식을 지니고 있다. 상당 기간 국제 대형 행사 개최 경쟁이 펼쳐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기업들의 위상이 올라가면서 한국 경제인들을 포럼에 유치하기 위한 움직임도 본격화되고 있다. 국내 금융사의 한 최고경영자(CEO)는 “중동에서 열리는 여러 포럼에서 매년 초청받고 있다. 단순한 참가를 원하는 게 아니라 발표자나 패널로 참여해 달라고 한다”며 “그만큼 한국 경제의 위상이 올라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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