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무역전쟁은 사실 정보기술(IT)·인공지능(AI) 등 첨단 기술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다.”
블룸버그통신은 미국과 중국의 갈등을 ‘기술 냉전(Tech Cold War)’이라고 평가했다. 무역 전쟁이 단순한 관세 전쟁이 아니라 상업적 이익과 국가 안보가 걸린, 양국의 기술 우위 다툼이라는 해석이다. 지난달 8일 워싱턴포스트(WP)는 미중 무역전쟁이 진정 상태(cooling off)에 접어들었지만 기술 전쟁은 가열되고 있다(heating up)고 경고했다. 미중 양국이 AI 개발 등 전 분야에서 경쟁하면서 무역 갈등보다 더 심각한 기술 패권 경쟁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 AI에서 우주와 해저까지 전선 확장
미국이 중국의 기술발전 가운데 특히 견제하는 분야는 AI다. 국립인공지능보안위원회(NSCAI)는 지난달 발표한 임시 보고서에서 미중 기술냉전의 가장 큰 위험은 AI에 있다고 지적했다. NSCAI는 지난해 8월 상원을 통과한 국방수권법(National Defense Authorization Act)에 따라 만들어진 국가위원회로 에릭 슈밋 전 구글 지주회사 알파벳 회장과 로버트 워크 전 국방차관이 이끌고 있다.
AI는 향후 20년 내에 성장률을 두 배로 끌어올릴 잠재력이 있어 혁신의 첨단에 있는 국가들이 투자를 늘리고 있다고 블룸버그가 전했다. 21세기를 중국이 지배할 것인지, 미국이 지배할 것인지는 AI 혁신을 누가 주도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AI는 이미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정부 간 ‘체제 경쟁’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AI를 실생활에서 활용하는 단계는 중국이 미국을 앞서고 있다. 중국은 AI를 사회신용 시스템에 도입해 21세기 ‘빅브러더’를 구축했다. 중국은 얼굴 인식 시스템과 빅데이터 기술을 사용해 시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 이를 위해 폐쇄회로(CC)TV 2억 대를 도입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ZTE, 다화, 중국전신 등 중국 기업들이 유엔 산하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의 얼굴인식, 비디오 감시 등을 위한 국제적 표준화 작업에 참여해 선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민들의 정보를 강제로 수집하지 않는 민주주의 정부는 상대적으로 빅데이터 분야에서 취약하다고 블룸버그는 꼬집었다.
미중은 ‘미래형 컴퓨터’라 평가받는 양자컴퓨터에서도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양자컴퓨터는 반도체가 아닌 원자를 저장소로 활용하기 때문에 슈퍼컴퓨터를 뛰어넘는 성능을 가졌다. 뉴욕타임스(NYT)는 미중이 양자컴퓨터를 중요한 국가안보 문제로 간주하고 우위를 확보하려 노력한다고 보도했다. 중국이 양자컴퓨터 실험실 구축에 4억 달러(약 4648억 원)를 투입하자 미국도 지난해 말 12억 달러 규모를 투입할 양자기술 진흥 법안을 통과시켰다.
기술냉전의 전선은 바다와 우주로 확장되고 있다. 전 세계 데이터 통신 중 1%만이 위성을 이용하며 나머지 99%는 해저 케이블로 전달된다. 화웨이를 비롯한 중국 회사들이 태평양 국가들을 연결하는 해저케이블 부설 사업에 뛰어들자 미국이 우려하고 있다고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전했다. 그런가 하면 중국이 1월 3일 인류 최초로 달의 뒷면에 탐사선 ‘창어(嫦娥) 4호’를 착륙시키자 미국은 우주군 창설을 공포하는 등 경쟁은 모든 분야에서 확대되고 있다.
○ ‘최후의 승자’ 없는 싸움
블룸버그는 6월 미중 기술 냉전의 승패를 분석하며 “무역전쟁처럼 완벽한 승자가 없는 길고 긴 싸움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블룸버그 평가에 따르면 시장 가치가 높은 상위 10개 기술 기업에 1위부터 5위를 마이크로소프트(MS), 아마존, 애플, 알파벳, 페이스북 등 미국 회사들이 싹쓸이했다. 중국 회사는 알리바바와 텐센트가 6위와 7위에 이름을 올렸다. 삼성전자는 9위에 랭크됐다. 아직은 시장가치와 관련된 분야에선 미국이 앞서 있다는 뜻이다.
중국은 AI 인재 비율에서도 미국에 밀렸다. 중국 칭화대 과학기술정책연구소에 따르면 2017년 말 기준 미국은 2만8000명의 AI 인재가 국제 AI 인력 풀에 등록돼 있으나 중국의 AI 인재는 1만8000명에 불과했다. 중국 최대 반도체 제조회사 하이실리콘의 지난해 이익은 인텔의 지난해 이익 700억 달러의 10분의 1 수준인 72억 달러에 불과했다.
반면 중국은 첨단 산업 제조와 5세대(5G) 시장 점유율에서 미국을 앞질렀다. 미국이 두려움을 갖기 시작한 것도 중국의 갑작스러운 성장 때문이었다. 중국의 스마트폰, 항공우주품 등 생산 규모는 약 4조 달러에 달했으나 미국은 그 절반 수준이었다. 모바일 인프라 시장 점유율에서 중국 화웨이는 29%로 점유율 1위를 차지했지만 미국 회사는 상위 3개 회사에 이름을 올리지도 못했다.
한편으로는 미중이 따로 갈 수는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FT는 미중이 첨단 산업에 있어서 ‘디커플링(탈동조화)’될 수 없으며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고 지적했다. 중국은 기술 발전에 관계없이 여전히 서구 국가들의 노하우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미국은 ‘세계의 공장’ 중국에 자국 회사들의 제품 생산을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슈밋 전 알파벳 회장 역시 “디커플링은 미국에도 손해다. AI 경쟁에 참여하더라도 미국은 극단적인 정책을 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 미중 기술전쟁 직격탄 맞은 화웨이
미국의 제재를 가장 먼저, 가장 많이 받고 있는 중국 기업은 통신장비업체 화웨이다. 화웨이는 지난해부터 이어온 미중 무역전쟁의 중심에 있었다. 미국의 화웨이 때리기는 지난해 12월 1일 캐나다 경찰이 미국 정부의 요청으로 이란 제재 위반 관련 혐의를 받고 있는 멍완저우(孟晩舟) 화웨이 부회장을 체포한 것으로 시작됐다. 올해 1월에는 미 법무부가 미국 3위 통신회사인 T모바일의 로봇 기술을 빼돌린 혐의를 들어 화웨이 수사에 나섰다. 화웨이 압박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외국의 위협으로부터 미 정보통신기술(ICT) 및 서비스를 보호하겠다”며 5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는 행정명령에 선포하면서 최고조에 올랐다. 미 상무부는 이어 화웨이 및 70개 계열사를 거래제한 기업 명단(블랙리스트)에 올렸고, 미국 기업이 화웨이 계열사와 거래하기 위해서는 미국 정부의 허가를 받도록 했다. 미국은 동맹국들에도 5G 인프라 사업자 선정에서 화웨이를 배제할 것을 요청하면서 반(反)화웨이 전선 구축에 나섰다.
그러나 미국의 조치는 화웨이에 결정타를 안기지 못했다. 미국의 제재에도 화웨이의 올 3분기(7∼9월)까지 매출액은 6810억 위안(약 113조869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24.4% 증가했다. 런정페이(任正非) 화웨이 회장은 ‘트럼프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있는 상황에도 내년에 최소한 10% 이상 성장할 것이라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러는 사이 미 상무부는 미국 소비자들의 불편 최소화를 이유로 거래제한 조치 적용을 벌써 세 차례나 유예했다.
미국 정부는 화웨이 제재를 발표하며 화웨이가 중국 정부와 연계돼 국가 안보를 위협한다는 점을 들었다. 25일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화웨이는 중국 당국으로부터 최소 750억 달러(약 87조2000억 원) 상당의 지원을 받아 성장했다.
미국의 화웨이 때리기는 안보 위협 외에도 세계 5G 통신망 산업에서 화웨이를 몰아내겠다는 속내가 담긴 것이라는 해석이 많다. 현재 통신 장비 분야에서 글로벌 점유율 1위(29%)를 차지하고 있는 화웨이는 5G 분야 점유율 1위를 굳히고 있다. 올해 2월 기준 5G 표준 필수 특허 보유 상위 10개 회사에 화웨이가 1529건으로 가장 많은 특허를 보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2위는 핀란드 노키아(1397건), 3위는 삼성전자(1296건)였다. 미국 퀄컴은 787건으로 4위 중국 ZTE(1208건)에도 한참 못 미쳤다.
중국의 ‘통신굴기’는 화웨이 하나에 의존하지는 않는다. 중국 차이나모바일, 차이나유니콤, 차이나텔레콤 등 3대 이동통신사는 지난달부터 5G 서비스 상용화를 시작했다. 소비자들은 베이징, 상하이를 포함해 중국 내 50개 도시에서 5G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영국 BBC는 “중국이 세계에서 가장 큰 5G 네트워크 중 하나를 출시했다”며 내년도 예정이었던 상용화를 앞당긴 것은 미국과의 기술 전쟁을 고려한 결정이었다고 평가했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행정부에서 재무부 장관으로 재직한 헨리 폴슨은 WP에 기고한 칼럼에서 “미국은 중국이 5G 경쟁에서 이기도록 내버려 두고 있다. 이제는 따라잡을 시간”이라고 지적했다. 폴슨 전 장관은 AI에서 5G에 이르기까지 기술적 기반을 마련한 것은 미국이지만 이를 상용화한 것은 중국이라고 꼬집었다. 5G 장비 제조업체가 없는 미국은 여전히 유럽 또는 중국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 코믹 동영상 제작 앱 ‘틱톡’에도 불똥
미중 기술냉전의 불똥은 중국산 동영상 제작 앱 ‘틱톡’에도 튀었다. 틱톡은 중국 베이징에 본사를 둔 스타트업 바이트댄스가 2016년부터 서비스하고 있는 동영상 플랫폼이다. 올해 1월 틱톡의 기업가치는 750억 달러로 평가돼 우버를 넘어선 세계 최대 스타트업 유니콘으로 인정받는다.
‘메이드인 차이나’ 앱이지만 틱톡은 북미 등 글로벌 시장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2017년에는 ‘뮤지컬.리(musical.ly)’라는 앱을 인수하며 북미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11월 기준 미국 내 틱톡 사용자는 월간 2650만 명에 달한다. 이 중 60%가 16∼24세의 청소년으로 집계돼 젊은층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다.
미국은 지난달 중국 공산당의 검열 가능성을 이유로 내세워 틱톡에 대한 국가안보 조사를 개시했다. 미국 민주당은 틱톡을 포함한 중국산 소셜미디어를 신병 모집에 이용하지 말 것을 미 육군에 촉구했다. 미 육군과 해군은 사이버 보안에 위협이 될 수 있다며 소속 장병들에게 정부가 지급한 휴대전화에서 틱톡을 삭제하라고 지시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틱톡은 적극적 해명과 함께 ‘중국색 지우기’에 나섰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아 보인다. 틱톡의 미국 책임자 버네사 패퍼스는 “중국 정부를 포함해 어떤 외국 정부의 영향도 받지 않는다”고 해명하며 모든 미국 사용자의 데이터는 미 버지니아주와 싱가포르에 저장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압박으로 틱톡은 내년 초 홍콩 증시 상장도 미뤄질 가능성이 높다. 미 경제전문지 비즈니스인사이더는 “틱톡이 ‘제2의 화웨이’가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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