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샌프란시스코 앞바다에 멈춰 서 있는 크루즈 ‘그랜드 프린세스’호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가 잇따라 나오면서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 사태가 재현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미국의 심장부인 수도 워싱턴에서도 처음으로 확진자가 확인되면서 미국 내 코로나19 공포가 확산일로를 걷고 있다.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는 지난달 11~21일 미국 샌프란시스코항을 떠나 멕시코를 다녀온 뒤 지난달 21일 다시 하와이로 향했다. 하지만 4일 귀항명령을 받았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내린 사람 중 71세 미국 남성이 코로나19로 4일 숨졌기 때문이다. 당시 이 남성은 일주일 정도 감기 증세가 나타났으며 지난달 20일 처음 선내 의무실을 찾았다. 코로나19 잠복기를 감안할 때 승선 전부터 이미 감염됐을 가능성이 있다.
이 배에는 54개국 국적 승객 2422명과 승무원 1111명 등 총 3533명이 탑승하고 있다. 승객 62명은 사망한 남성과 함께 멕시코에 다녀온 사람들이다. 지금까지 21명(승객 2명, 승무원 19명)이 확진 판정을 받았다. 우리 외교부에 따르면 한국인 4명이 탑승해 있지만 이들의 건강은 양호한 상태다.
미 정부는 696명의 확진자가 나온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의 경우 선내 격리가 오히려 바이러스를 확산했다는 지적에 따라 승객들을 하선시킬 예정이다. 이 배는 9일(현지 시간) 캘리포니아 오클랜드항에 정박할 예정이다. 마이크 펜스 부통령은 이날 “심각한 상태의 환자들을 육상 시설로 옮기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며 “선내에 격리하면 크루즈선이 바이러스의 운반체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사망한 남성과 함께 멕시코를 다녀온 승객 2500여명이 이미 샌프란시스코에서 내려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는 점이다. 이들이 미국 전역에 코로나19를 확산시키는 기폭제가 될 우려가 있다. 로스앤젤레스(LA)타임스에 따르면 하선한 사람 가운데 사망자 외에 적어도 7명이 이미 확진 판정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보건당국은 하선한 승객들을 추적할지 여부를 검토 중이라고 밝혔지만 이들이 이미 각자의 집으로 뿔뿔이 흩어진 뒤여서 진행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미국 수도 워싱턴과 인근 지역에서 3명의 코로나19 사례가 보고됐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7일 보도했다. 워싱턴에 거주하는 50대 남성이 코로나19 증세로 입원했고, 워싱턴을 여행하던 또 다른 남성도 감염된 것으로 추정된다. 워싱턴 인근 버지니아주 포트 벨보아의 해병 1명도 확진 판정을 받았다. 이들은 중국 등 해외여행을 하거나 감염자와 접촉하지 않은 사례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이달 초 워싱턴에서 열렸던 이스라엘공공정책위원회(AIPAC) 콘퍼런스에 참석했던 인사 중 최소 2명이 양성 반응을 보였다고 보도했다. 백악관에서 불과 20분 거리에 있는 워싱턴 하버에서 지난달 말 열린 보수정치행동회의(CPAC) 행사 참석자 1명도 이날 확진 판정을 받았다. 두 행사에는 정·관·재계의 거물급 인사들이 다수 참가했으며 CPAC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참석했다.
워싱턴으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몰려 사는 메릴랜드주 몽고메리 카운티에서도 2월 말 함께 해외여행을 다녀온 70대 부부와 50대 여성 등 모두 3명의 확진자가 발생했다. 미국 내 감염자는 437명으로 늘었다. 뉴욕주는 확진자가 89명까지 늘어나자 앤드루 쿠오모 뉴욕주지사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워싱턴=이정은 특파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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