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는 평가를 내렸다.”
11일(현지시간) 테워드로스 거브러여수스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대해 세계적 대유행, 즉 팬데믹(pandemic)이라고 규정했다. 지난해 12월 중국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시가 ‘원인 불명의 폐렴’이 나타났다고 밝힌 지 71일 만이다. 그 사이 114개국에서 11만8000명이 감염됐고 4291명(이상 11일 기준)이 숨졌다.
● 낙관적 평가와 늑장대응 논란
WHO의 선언 전부터 사실상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됐다는 지적이 꾸준히 나왔다. 유럽의 환자가 폭증하면서 여러 대륙에 걸친 유행이 현실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세계 여러 학자들은 팬데믹이 도래했다고 밝혔다. 기다리다 못한 미국 CNN 방송은 9일부터 자체적으로 현 상황에 대해 팬데믹이란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WHO는 선언 직전까지 소극적인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5일만 해도 거브러여수스 사무총장은 “우린 아직 거기(팬데믹)에 이르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다 유럽 확진자가 무섭게 증가하자 부랴부랴 며칠 만에 팬데믹이 도래했다고 밝힌 것이다.
이런 상황은 처음이 아니다. 1월 30일 국제적 공중보건 비상사태(PHEIC)를 선포할 때에도 3번의 회의를 거쳐 겨우 합의된 선언을 내놨다. 이미 사망자를 100명을 넘긴 뒤였다.
한 보건 전문가는 “상환 판단도 늦었지만 상황에 대한 인식도 안일했다”고 지적했다. 지나치게 낙관적인 평가와 전망이 많았다는 것. 특히 중국 상황에 대한 발언은 일반의 인식과 크게 달랐다. 지난달 중국 정부의 대응을 조사한 WHO 전문가팀은 공동 기자회견을 통해 “중국이 우한을 봉쇄한 덕에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세계가 (중국에) 빚을 졌다”고 말했다. 중국 측에 대해 “야심 차고 발빠른 대응을 했다” “발병사태를 호전시킨 유일한 나라” 같은 평가를 내놓기도 했다.
비상사태 선포를 앞둔 1월 28일 베이징을 찾은 거브러여수스 사무총장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을 만나 “전염병 대처를 위해 중국 정부가 보여준 확고한 해결 의지와 시의적절하면서도 효과적인 대처가 감탄스럽다”고 치켜세웠다. “시 주석이 개인적으로 훌륭한 리더십과 지도자적 역량을 보여주고 있다. 중국의 대처는 단지 자국민을 보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 세계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다”고도 했다. 당시 확진 환자가 5000명에 육박하는 상황이었다.
● 중국 고려한 정치적 선택?
질병관리본부장을 역임한 정기석 한림대성심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는 “정치적인 고려가 이뤄진 것이다. 무엇보다 중국의 눈치를 본 것”이라고 설명했다.
WHO가 중국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대체로 의견이 모아진다. 내부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무총장만 해도 중국의 지원으로 당선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무총장인 거브러여수스는 동아프리카 에리프레아 태생으로 아프리카 출신으로는 첫 사무총장이다. 비(非)의사 출신으로도 처음이다. 주류가 아닌 탓에 당선되는 데 중국의 역할이 컸다. WHO 내부 상황을 잘 아는 국내의 한 관계자는 “개발도상국의 좌장격인 중국의 전폭적 지지로 결선에서 상대 후보의 3배 가까운 득표를 하고 선출됐다. 지금도 중국 덕에 많은 개발도상국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전했다.
차기 연임을 바라는 거브러여수스 입장에서는 계속 중국에 협력할 수밖에 없다. 한 보건 전문가는 “거브러여수스는 정치인 출신으로 젊고 야심이 있는 인물”이라며 “차기 연임을 위해 기반을 쌓으려면 어느 정도 정치적으로 행동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55세인 거브러여수스 사무총장은 2017년 선출돼 임기 4년차를 맞고 있다. WHO 사무총장의 임기는 5년. 연임이 가능하다.
최근 중국은 WHO에 대한 투자와 지원을 늘리고 있다. 친중(親中)인사인 거브러여수스가 당선되자 중국은 WHO에 에이즈(AIDS·후천성면역결핍증) 퇴치기금 지원을 약속했다. 일대일로(육·해상 실크로드) 사업의 일환으로 600억 위안(약 10조3000억 원)도 투자하기로 했다. WHO의 운영자금은 본부가 각 회원국에 배정한 일종의 분담금과 회원국의 기부금으로 이뤄진다. 투자를 많이 하는 나라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 ‘신중한 판단’ 평가도 나와
하지만 WHO가 정치적 선택에 휘둘리는 것만은 아니라는 반론도 나온다. 질병관리본부(질본) 본부장을 지낸 전병율 차의과대 예방의학과 교수는 “2009년 신종 인플루엔자(신종플루) 유행 때 오히려 WHO가 너무 빨리 팬데믹을 선포하는 바람에 많은 국가들이 피해를 봤다. 이런 전례가 있어 비상사태나 팬데믹을 꺼내는 데 신중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종플루 사태 때는 74개국에서 3만 명의 확진 환자가 발생했을 때 팬데믹이 선언됐다. 당시 많은 나라들이 대유행을 염두에 두고 치료약 등을 잔뜩 구비하면서 과잉대응, 항바이러스제 남용 등의 문제가 불거졌다.
거브러여수스 사무총장도 11일 브리핑에서 “팬데믹은 가볍게 혹은 무심하게 쓰는 단어가 아니다. 자칫 잘못 사용하면 비이성적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바이러스와의) 전쟁이 끝났다고 인정하는 셈이 된다”고 설명했다.
중국의 WHO 기여도가 실제 그리 높지 않다는 이야기도 있다. 국내의 한 보건 전문가는 “중국이 최근 들어 많은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WHO 전체 기여금을 보면 미국 등 서구 국가들 비율이 높다”고 말했다. 그는 “몇몇 사례를 근거로 ‘중국 돈에 넘어갔다’고 보는 시각은 너무 단편적이다”고 지적했다.
조직 내부에서도 사무총장에 대해 부정적인 분위기는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의 한 관계자는 “194개 가맹국 중 133개 국가의 절대적 지지를 업고 당선된 데다 내부에서는 잘 하고 있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전했다.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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