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을 거듭한 국제유가가 패닉 현상까지 겪으며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국내 정유사들은 “오늘이 최악”이라며 우려하는 반면, 석유화학사들은 장기적인 호재로 작용해 실적 개선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지난 20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정규장에서 서부텍사스산원유(WTI) 5월 인도분 가격은 전날(18.27달러)보다 55.90달러 하락한 배럴당 -37.63달러로 거래를 마쳤다. 원유 생산업체 입장에선 1배럴당 37달러의 웃돈까지 줘야 원유를 넘길 수 있다는 얘기다.
WTI 선물이 하루만에 300%가량 폭락한 것, 마이너스로 거래를 마감한 것 모두 1983년 뉴욕상업거래소가 문을 연 이후 사상 처음이다. 이날 블룸버그는 “글로벌 원유 산업에 괴멸적인 하루”라고 보도했다.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전세계적인 수요가 급감했지만, 원유 공급은 넘쳐났던 게 이번 유례없는 급락 사태의 주요 원인이다. 여기에 WTI 5월물(선물)의 만기를 하루 앞둔 상황에서, 일부 헤지펀드가 하루 뒤 원유를 넘겨받기보다 대거 손절한 후 6월물로 갈아타는 ‘롤 오버(Roll-Over)’를 선택한 점도 영향을 미쳤다.
국제유가가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하면서 국내 정유업계의 긴장도 커지고 있다. 정유사는 수입한 원유를 정제해 판매하는 과정까지 2~3개월이 걸리는데, 이번처럼 단기간에 유가가 급락하면 과거에 비싸게 산 원유 비축분의 가치가 떨어지는 ‘재고평가 손실’을 보게 된다.
정제마진도 반등할 기미가 없다. 4월 셋째주 정제마진은 -0.1달러로 3월 셋째주부터 5주 연속으로 마이너스다. 현재 수준으로는 팔수록 손해가 난다는 얘기다. 팔아도 손해인데 코로나19로 수요가 급감해 팔 수도 없다. 그만큼 석유는 쌓이지만 산유국과의 장기 계약으로 원유는 계속 들어와 저장 비용은 갈수록 늘어나는 상황이다.
증권업계는 올해 1분기 정유 4사의 영업손실이 2조5000억~3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한다. 정유업계가 지금까지 최악이라고 보는 시기는 산유국들이 셰일가스 패권을 놓고 가격 경쟁을 벌여 유가가 급락한 2014년 4분기인데, 당시 정유 4사의 손실은 1조1500억원 수준이었다. 한 정유사 관계자는 “지금이 역대 최악”이라고 단언했다.
유례없는 위기에 정부도 정유업계와 만나 대책을 논의한다.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오는 22일 국내 정유 4사 최고경영자(CEO)와 간담회를 갖는다. 성 장관과 정유 4사 수장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정유사들은 정부에 세제 혜택 등 사태 장기화에 따른 실질적인 대책을 요청할 전망이다.
반면 석유화학사들은 다소 입장이 다르다. 제품 원료인 국제유가가 급락했기에, 원유를 정제해 나오는 나프타 가격도 낮아져서다. 화학사는 나프타를 분해했을 때 나오는 에틸렌 등을 가공해 다양한 플라스틱 제품을 만드는데, 원가 부담을 덜 수 있게 됐다.
특히 국내 화학사들이 나프타를 분해해 에틸렌을 생산하는 나프타분해설비(NCC)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도 호재다. 반면 중국은 석탄을 기반으로 한 석탄분해설비(CTO) 방식으로 에틸렌을 생산한다. 한국 화학사들은 이번 국제유가 하락의 특수를 누리지만, 글로벌 시장에서 가장 큰 경쟁자인 중국은 그렇지 못한다는 얘기다.
코로나19가 종식된 이후 전세계적으로 수요가 회복되면, 국내 화학업계는 국제유가 급락을 겪었던 2015년의 호황을 다시 맞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황유식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이번 유가 하락시에는 셰일가스·오일 생산량이 감소할 것으로 전망된다”며 “원가 경쟁력이 압도적으로 개선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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