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속에서 세계 양극화 문제가 더 심각해지고 있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우선 각국 사망자와 감염자의 상당수가 유색 인종, 저소득층, 고령자, 외국인 노동자 등 취약계층이다. 이들은 실직, 주거난 등 코로나19에 따른 경제적 타격도 다른 계층에 비해 심하게 받고 있다.
이 와중에 부유층은 바다 위 호화 요트, 최첨단 지하 벙커, 외딴 섬 등에서 안락한 도피 생활을 즐기고 있다. 경기가 더 나빠진다는 데 돈을 걸어 천문학적 이익을 본 투자자도 있다. 코로나19가 계급 분화를 심화시켜 ‘신(新)카스트 시대’의 도래를 앞당기고 있다는 분석마저 나온다.
○ 코로나19가 만든 4계급
과거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미국 노동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지난달 26일 가디언 기고문에서 “코로나19가 미국의 계급 분열을 심화시켰다”며 네 가지 계급을 정의했다.
첫 번째는 ‘원격 노동자(The Remotes)’다. 전문직, 관리직, 기술직 노동자들로 노트북으로 장시간 근무가 가능하며 코로나19 감염 위험도 비교적 낮다. 무엇보다 코로나19 사태 전과 거의 같은 급여를 받는다. 두 번째는 군인, 의료진, 경찰관, 소방관 등 ‘필수 노동자(The Essentials)’다. 실직 위험은 낮으나 코로나19 사태에도 현장을 지켜야 해 감염 위험에 노출돼 있다. 세 번째는 코로나19 사태로 실직한 사람과 무급휴직 중인 이들을 뜻하는 ‘임금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The Unpaid)’다. 마지막이 교도소, 노숙인 시설, 이민자 수용소에서 지내는 이들을 뜻하는 ‘잊힌 노동자(The Forgotten)’다. 집단생활을 하고 사회적 거리 두기가 사실상 불가능해 감염 위험이 대단히 높다.
라이시 교수는 “첫 번째 계급을 제외한 세 계급은 대개 흑인과 히스패닉”이라며 이들을 방치하면 첫 번째 계급의 안전조차 장담할 수 없다고 우려했다. 온라인 매체 액시오스 역시 “코로나19가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사이에 선명한 선을 그었다”며 원격근무 가능 여부, 의료보험 유무 등이 생사를 결정짓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지적했다. 일종의 ‘신(新)다위니즘’이라는 의미다.
○ 미 흑인 사망 비율, 백인의 2.5배
세계 최대 코로나19 피해국인 미국에서는 흑인의 피해가 특히 크다. 미 조사회사 APM 리서치랩에 따르면 미 인종집단별 코로나19 사망자 구분에서 흑인 사망자 비율이 백인보다 월등히 높았다. 4일 기준 인구 10만 명당 흑인 사망자는 32.7명으로 백인(13.1명)보다 2.5배 높았다. 아시안(14.6명), 히스패닉(14.9명)과도 2배 이상 차이가 난다.
일부 주에서는 흑인 사망자 비율이 인구 비율보다 4배 가까이 높았다. 미시간주의 흑인 인구 비율은 14%지만 코로나19 사망자 중 흑인 비율은 3.7배 높은 52%다. 인근 일리노이주도 인구의 14%가 흑인이지만 사망자 중 비율은 3.3배 많은 46%다.
코로나19 초기 ‘방역 모범국’이었지만 최근 확진자 급증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싱가포르에서는 열악한 주거 환경에서 생활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집중 피해를 입고 있다. 지난달 27일 기준 누적 확진자 1만4423명 중 무려 84.5%(1만2183명)가 기숙사 생활을 하는 이주 노동자였다.
이들 사회적 취약계층은 고품질 의료 서비스에 대한 접근이 제한적인 데다 상당수가 기저 질환을 앓고 있다. 먹고사는 문제로 사회적 거리 두기 또한 지키기 어렵다. 좁고 밀폐된 요양병원에 갇혀 있는 노약자들 역시 대부분 기저 질환을 앓아 집단감염에 취약하다.
○ 물 부족 및 기아에 신음하는 개도국 취약계층
복지 체계가 비교적 잘 갖춰진 선진국과 달리 개발도상국의 취약계층은 코로나19로 말 그대로 생존을 위협받는 처지에 몰렸다. 최근 세계은행은 지난해 8.2%였던 세계 빈곤율(전체 인구 중 하루 1.9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인구 비율)이 올해 8.6%로 오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당초 7.8%를 예상했지만 코로나19 발생 후 전망치를 수정했다. 특히 빈곤율 상승은 1998년 아시아 외환위기 이후 약 22년 만에 처음이라고 덧붙였다.
세계은행은 올해 인도 1200만 명, 나이지리아 500만 명, 인도네시아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각각 100만 명 이상이 새롭게 극빈층에 포함될 것으로 내다봤다. 세계 전체로는 4000만∼6000만 명이 빈곤층으로 내몰릴 것으로 예상했다.
남아공 케이프타운의 빈곤층 거주지 ‘카이얼리차 타운십’에서는 주민들이 손 씻을 물조차 부족해 신음하고 있다. 한 주민은 2일 AFP통신에 “물을 얻은 지 사흘이 지났다. 정부의 물 트럭이 언제 올지도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3일 인도네시아 자바섬 중부 클라텐에서는 40대 남성이 “신장을 판다”는 피켓을 걸고 돌아다녔다. 현지 언론 데틱뉴스는 세차장에서 근무하던 이 남성이 코로나19 여파로 실직했고 아내와 자녀 4명을 먹여 살리기 위해 장기 매매에 나섰다고 전했다.
인도에서는 3월부터 시작된 초강경 봉쇄 조치로 저소득 노동자들이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일자리가 있던 대도시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려던 노동자들이 교통편을 구하지 못해 도보로 이동하다 숨지는 사례가 잇따랐다.
선진국인 영국에서조차 결식아동 문제가 불거졌다. 이달 초 옵서버는 3월 23일 코로나19로 봉쇄가 실시된 후 한부모 가정의 30%, 지체장애 아동이 있는 가정의 46%에서 아동 끼니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전했다.
○ 호화 요트·외딴섬 휴양… 폭락장서 3조 원 수익도
지난달 20일 블룸버그뉴스는 미국 실리콘밸리 거주민 중 상당수가 개인용 제트기 등을 타고 뉴질랜드로 갔다고 전했다. 7일 국제 통계사이트 월드오미터 기준 뉴질랜드의 확진자는 불과 1490명. 지난달 27일 저신다 아던 총리는 “전쟁에서 승리했다”며 3월 24일부터 실시하던 전국 봉쇄령을 완화했다.
코로나19가 전 세계로 확산되기 전인 2월 초부터 개인용 제트기에 대한 수요는 공급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미 유명 영화제작자 데이비드 게펀은 3월 인스타그램에 5억9000만 달러(약 7230억 원) 상당의 호화 요트 사진과 “바이러스를 피해 카리브해 그레나딘 제도에서 격리 중”이라는 글을 올렸다. ‘억만장자가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고통에 전혀 공감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거세지자 게시물을 삭제했다.
3월 CNBC는 벙커와 방공호를 만드는 회사 라이징S컴퍼니의 매출이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4배 늘었다고 전했다. 코로나19를 피하려는 부자들의 제작 요청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개인 수영장 등을 갖춘 호화 벙커 제작비는 최소 15만 달러(약 1억 8400만 원)다.
억만장자들은 건강 상태가 확실한 소수의 근무자와 보급품을 챙겨 몇 달이고 선상 생활을 즐길 수 있다. 보급품이 떨어지면 항공기로 받으면 되고 한 섬이 지겨워지면 다른 섬으로 이동하면 된다. 미 고급 요트 대여업체 버지스의 조너선 베킷 최고경영자(CEO)는 “많은 고객들이 자녀들을 위한 홈스쿨링, 직속 요리사와의 요리수업 등을 요구하고 있다”고 전했다.
미 헤지펀드 업계의 큰손 빌 애크먼 퍼싱스퀘어캐피털 대표는 미 금융시장의 급락을 틈타 2700만 달러(약 331억 원)의 신용부도스와프(CDS)를 사들였다. 채권 발행 국가와 기업이 부도가 나서 원금을 돌려받지 못할 때를 대비한 파생상품으로 채권 값이 하락할수록 많은 돈을 버는 구조다. 배런스 등에 따르면 그는 이런 고수익 고위험 투자로 3월 23일 기준 투자금의 약 100배인 26억 달러(약 3조2000억 원)를 벌었다.
코로나19가 안정기에 들어선 중국에서도 양극화가 두드러진다. 8일 CNN은 사회과학원 자료를 인용해 3월 말까지 약 8000만 명의 중국인이 일자리를 잃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CNN은 “중국이 3월 도시 실업률을 5.9%로 발표했지만 2억9000만 명에 달하는 농민공을 포함하지 않았다. 실업률을 지나치게 낮게 발표한다”고 지적했다. 올해 870만 명의 대학 졸업자 역시 구직난에 직면할 것으로 내다봤다.
중국 부유층은 누적된 소비 욕구를 맘껏 해소하고 있다. 지난달 13일 중국 광저우(廣州) 에르메스 매장은 영업을 재개한 첫날 매출액이 1900만 위안(약 33억 원)을 기록해 중국 단일 상점 중 하루 최고 매출을 경신했다. 3월 미 전기차 테슬라의 중국 내 차량 등록도 2월보다 450% 급증했다. 지난달 상하이(上海)에서는 1700만 위안(약 29억 원)∼7800만 위안(약 134억 원) 상당의 고급 아파트 160채가 거래됐다고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보도했다.
○ 제2의 ‘월가 점령’ 시위 오나
일각에서는 코로나19로 인한 양극화가 2011∼2012년 미국 뉴욕을 뜨겁게 달군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시위를 다시 불러올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당시 시위대는 2008년 금융위기 후 ‘1 대 99’의 사회가 도래했다며 불평등 해소를 주장했다.
3월 중순 봉쇄령이 내려진 지 7주 만에 3350만 명의 미국인이 실직했다. 퓨리서치센터에 따르면 4월 기준 미 실직자 10만 명당 히스패닉이 61%, 흑인이 44%를 차지해 백인(38%)보다 훨씬 많았다. 이에 따른 경제적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도 급증했다. 1일 경제매체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여론조사 결과 미국인의 23%가 “이달 월세를 내지 못할 수 있다”고 답했다고 보도했다.
3월 말부터 미 곳곳에서는 ‘렌트 스트라이크(Rent Strike)’라는 집세 거부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코로나19로 실직한 사람들이 “집세를 낼 돈이 없다”며 아파트 창문에 하얀 천을 걸어 집세 거부 의사를 표명하는 방식이다. 뉴욕타임스(NYT) 역시 뉴욕 세입자의 40%가 4월 임차료를 내지 못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은 일부 요식업체도 가세했다. 지난달 치즈케이크팩토리는 “4월 임차료를 내지 않겠다”고 밝혔다. 웬디스도 “향후 90일간 매장 임차료 절반의 지급을 미루겠다”고 했다.
일부 집주인은 월세를 못 내는 세입자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이용해 성희롱을 일삼고 있다. 세입자가 실직 등으로 임차료를 내기 어렵다고 호소하자 음란한 사진을 보내거나 성관계를 요구하는 식이다. 뉴욕주의 한 집주인은 월세를 깎아주는 대신 성관계를 요구했다 제소당해 40만 달러(약 4억9000만 원)의 합의금을 냈다.
일부 취약계층은 코로나19에 걸려도 치료를 포기하고 있다. 지난달 28일 한 여론조사에서 18세 이상 미국 성인의 10%는 “설사 코로나19에 감염돼도 치료와 검사 모두 포기하겠다”고 답했다.
일각에서는 집세 거부 운동으로 소규모 임대인이 도산하고, 장기적으로는 주택시장 전체가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 버금가는 타격을 입을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CNBC에 따르면 미 임대시장의 절반을 1∼10개 부동산을 보유한 소규모 임대업자 약 800만 명이 차지하고 있다. 이들과 계약을 맺은 세입자는 약 4800만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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