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난민기구(UNHCR) 친선대사이자 배우인 엔젤리나 졸리(45)가 미국 어머니의 날(10일)을 맞아 “지구상 가장 강한 사람은 어머니”라며 모성(母性)에 대한 존경의 메시지를 보냈다.
졸리는 8일(현지 시간)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어머니의 힘’이라는 글에서 무명배우 출신으로 자신의 꿈을 포기했던 자신의 어머니 마르셀린 버트란드의 헌신과 자신이 어머니가 되어 자식을 키운 뒤에야 느낀 어머니의 애환, 난민 특사로서 전 세계에서 만난 난민촌 여성들이 자식을 지키기 위해 보여준 헌신을 위대한 ‘어머니의 힘’이라고 소개했다. 다음은 기고문 전문.
‘어머니의 날’은 어머니를 잃은 사람들에게는 힘든 날이다. 올해는 특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더욱 그렇다. 너무 많은 이들이 부모를 갑자기 잃었다. 곁을 지키지 못하고, 늘 자신들이 꿈꿔왔던, 받았던 사랑을 돌려드리지 못한 채 말이다.
우리 어머니는 내가 30대에 돌아가셨다. 당시를 돌이켜보면 어머니의 죽음이 나를 얼마나 많이 변화시켰는지 알 수 있다. 갑작스러운 일도 아니었지만 내 안의 많은 것이 바뀌었다. 포근히 안아주던 어머니의 사랑과 따뜻함을 잃는 것은 누군가 따뜻한 담요를 빼앗는 것과 같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나는 오른 손에 작은 문신을 새겼다. 남들이 보면 알파벳 ‘m’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건 어머니 이름 마셸린(Marcheline)의 ‘m’이 아니라 윈터(Winter·겨울)의 ‘w’다. 어린시절 어머니가 내게 불러주던 롤링 스톤즈의 노래인데 나도 무척이나 좋아했다. “추운, 추운 겨울이었지,” 어머니는 내가 아기였을 때 이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내 코트를 너에게 둘러주고 싶어”라는 가사 부분에서 어머니는 내게 담요를 둘러주며 안아주셨다.
나는 어머니를 사랑했다. 어머니는 시카고 남부 카톨릭 집안에서 자라셨다.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였던 할아버지는 볼링, ‘M*A*S*H’(1972~1983년 방영된 TV 드라마), 베니 힐(영국 코미디언), 그리고 우리 할머니 로이스를 사랑했다.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기 전, 어머니가 20대였을 때 돌아가셨다고 한다. 어머니의 남자친구는 할머니를 ‘다이아몬드 루이스’라고 불렀다고 한다. 할머니가 사교계 명사여서가 아니라 다이아몬드를 끼고 마루를 닦으셨기 때문이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1960년대 로스앤젤레스(LA)로 이사 가기 전까지 두 분은 볼링장을 운영하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살아있다는 느낌을 좋아했고 잘 웃었다. 내가 우울해 할 때면 록음악으로 내 안의 열정을 되살려 주곤 하셨다. 존 레넌이 죽었던 날 밤에는 양초에 불을 켜시고는 집 안 곳곳에 비틀즈 앨범을 놓으신 적도 있다. 교황 요한 바오르 2세의 암살 기도 사건이 벌어졌을 때 어머니가 공인들의 안위를 걱정했던 기억도 난다.
어머니는 자신의 어머니(할머니)를 잃고 많이 슬퍼했다. 아버지의 외도 사건은 어머니의 인생을 바꿨다. 어머니가 꿈꿨던 가정생활은 모두 불타버렸다. 하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자신이 어머니임을 사랑했다. 배우의 꿈은 스물여섯에 아이 둘을 키우며 사라져버렸다. 유명한 전 남편은 어머니의 인생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을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단편영화에서 어머니가 연기하는 모습을 봤는데 연기를 잘 하셨다. 충분히 배우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내게 꿈은 그 형태가 바뀔 수도 있다고 말했다. 예술가가 되고 팠던 어머니의 꿈은 사실 어머니의 어머니(할머니)의 꿈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어머니는 내가 배우가 되기를 꿈꾸셨다. 우리 이전 세대의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꿈을 이루기까지 몇 세대를 걸쳤는지를 생각해 보면서 그 말이 얼마나 맞는 말인었나 생각하게 된다.
지금 ‘윈터’를 들으며, 어머니가 얼마나 외로웠고 두려웠을지, 동시에 아이들을 잘 키우기 위해 얼마나 굳건하게 맞서 싸우려 했을지 깨닫게 된다. 내 손에 ‘w’ 문신이 지워지면서, 내가 어머니에게 느꼈던 집 같은, 보호받는다는 느낌 역시 서서히 사라졌다. 인생의 굴곡도 여러 차례 맞았다. 나 역시 상실을 겪었고 인생이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을 경험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팠다.
하지만 이제 내가 내 어머니의 나이가 되고 나니 이제야 어머니를, 또 어머니가 느꼈을 감정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어머니는 ‘선셋 스트립’ 같은 클럽에서 밤 새 춤 던 로큰롤을 좋아하는 소녀였다. 어머니는 사랑의 상처 후에도 사랑했고 우아함과 미소를 잃지 않으셨던 분이었다.
이제 나는 혼자 있는 게 어떤 건지, 사랑하는 이에게 코트를 걸쳐주는 게 어떤 건지 안다. 또 사랑하는 사람들을 안전하고 따뜻하게 보호해줄 만큼 강할 수 있다는 그 헤아릴 수 없는 감사함도 잘 안다. 일단 당신의 인생에 자식이 생기면, 자식은 그 순간부터 영원히 늘 인생의 우선이 된다.
어머니의 날을 맞아 나는 이제껏 내가 만났던, 가난 속에 이곳저곳 옮겨가며 살고 있는 난민 어머니들을 생각해본다. 모든 어머니들은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겠노라는 다짐과 함께 어머니가 되는 여정을 시작했다. 이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내려놓기도, 침묵하기도, 파괴당하기도 했으며, 더 비극적인 일들도 겪어야 했다.
난민들을 통해 지구상 가장 강한 사람은 어머니라고 믿을 수 있게 됐다. 어머니의 부드러운 살결은 속임수에 불과하다. 어머니는 사랑과 애착으로 움직이는 힘이다. 어머니보다 문제를 더 잘 해결하는 사람은 없다. 사랑밖에 줄 것이 없다면, 그 사랑은 어머니의 영혼에서부터 우러나온다.
어머니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했는데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그는 아마도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들은 자신의 몸이 학대당할 우려가 있을 지라도 위험한 곳에 가, 아이들에게 안전한 피난처를 마련해주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 싸울 것이다.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학대당한 여성은 ‘약한 여성’이 아니라 대부분 누군가의 어머니다. 이들은 때때로 꼼짝없는 위험을 감수하려 든다. 이들은 자식의 위험 앞에 선다. 기꺼이 따돌림과 비판을 받을 것이다. 이들의 유일한 생각은 이렇다. “내 자식 말고 나를 때려라. 내 자식 말고 나를 모욕하고 무시해라. 내 자식 것 말고 내 음식을 가져가라.”
이러한 여성들은 전쟁이나 난민캠프에서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이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남겨둔 채 새 인생을 찾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들은 10년이고 20년이고 계속 앉아 버틸 것이다. 나는 이제껏 만났던 난민 어머니들의 아름다운 얼굴을 가족 앨범처럼 모두 기억하고 있다. 눈에는 지친 기색이 가득했지만 그들은 절대 포기하지는 않았다. 한때 딸들이었던 이들은 이제 자신들의 자식들을 담요로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자식이 필요한 것을 가져다 줄 수 없다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은 없다. 이는 오늘날 팬데믹 속 미국에서조차 더 많은 가정들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자녀들이 당신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게 될 때, 때로는 그러한 이해가 어머니의 사랑 그 자체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자녀들이 커서 어머니가 자신을 버리지 않고, 불안한 환경에 두지 않고, 자신들을 위해 싸우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해질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도 마지막 남은 힘, 마지막 음식 한 입, 마지막 남은 담요 한 장을 자녀에게 주면서 무기력함을 느끼고 있을 이 세상 모든 어머니들에게 존경을 표한다. 또 혹시 어머니의 날에 슬퍼하는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의 추억에서 위로와 힘을 찾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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