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15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중국 최대 통신장비업체 화웨이(華爲)를 거래금지 명단(블랙리스트)에 올리고 미국 기업과의 거래를 금지했다. 화웨이가 미 국가안보를 해친다며 국가비상사태까지 선포한 채 화웨이 장비 사용을 막았다.
꼭 1년이 흐른 이달 15일 미국은 또 칼을 빼들었다. 우선 화웨이 거래 금지를 2021년 5월까지 1년 연장했다. 또 미국산 장비·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세계 모든 반도체 제조업체에 “화웨이에 반도체를 공급하려면 반드시 사전승인을 받으라”고 했다. 삼성, 대만 TSMC 등 세계 모든 반도체업체가 미국 기술을 쓰고 있음을 감안할 때 사실상 화웨이 납품을 금지한 것이나 다름없다. 최강대국은 왜 일개 사(私)기업을 이토록 견제하는 걸까.
●美 10여 년 전부터 “민간기업 탈 쓴 中 정보기관”
미국이 화웨이를 적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위장스파이 기업’ 의혹 때문이다. 미국은 화웨이가 민간기업의 외피를 두른 사실상의 중국 정보기관이라고 본다. 화웨이가 각국 통신망에 심은 ‘백도어(인증 없이 전산망에 침투해 정보를 빼돌리는 장치)’를 통해 전 세계 기밀정보를 중국 공산당에 제공하고 있다는 의미다.
로버트 오브라이언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2월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미국이 화웨이 장비에서 은밀한 백도어를 발견했다. 서구 국가를 염탐하는 장비”라고 주장했다. 2016년 미국 내에서 판매된 일부 화웨이 스마트폰에서 백도어가 발견된 적도 있다.
미국의 의심은 버락 오바마 전 행정부 시절부터 시작됐다. 2011년 미 국방부는 “화웨이가 중국 인민해방군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밝혔다. 한 해 뒤 하원 정보위원회는 “화웨이 등 중국 통신장비가 중국의 스파이 행위와 사이버전쟁에 이용될 가능성이 있다”며 장비구입 금지를 권고했다. 미 의회는 2018년 8월 화웨이 등 중국 기업의 통신장비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명시한 국방수권법을 통과시켰다.
실제 화웨이 창업자, 기업명, 슬로건, 성장 과정 등에서는 국수주의와 중화주의의 흔적이 짙게 풍긴다. 우선 기업명은 ‘중화유위(中華有爲·중화민족에 미래가 있다)’의 줄임말이다. 창업자 런정페이(任正非·76) 회장 역시 젊은 시절 인민해방군 장교로 복무했다. 런 회장은 1987년 화웨이 설립 후 정부 주요 사업을 독점적으로 수주하며 세계적 대기업을 만들었다. 그는 창업 초기부터 직원들에게 “마음으로부터 조국을 생각하라”고 독려해왔다.
지배구조와 운영 방식 또한 극도의 비밀에 싸여 있다. 2019년 매출이 8588억 위안(약 151조 원)에 달하는 공룡기업이지만 세계 어느 증시에도 상장을 하지 않았다. 창업자 런 회장의 지분도 1.4%에 불과하다. 화웨이 측은 “나머지 지분은 종업원들이 가졌다”고 주장하나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미국은 화웨이의 진짜 주인이 군, 공산당, 각 지방정부 고위 관계자이며 런 회장은 소위 ‘바지 사장’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151조 원 규모의 기업이 상장을 하지 않는 이유 또한 불투명한 지배구조를 감추려는 의도라고 본다는 의미다.
●中 기술굴기 상징
설립 및 성장 과정의 각종 논란을 차치해도 화웨이가 세계 정보기술(IT)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기업임은 분명하다. 화웨이는 2012년 이동통신장비 부문에서 스웨덴 에릭슨을 누르고 세계 1위에 올랐다. 이후 독보적 1위를 고수하며 2019년 기준 28%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도 2019년 기준 17.6%로 삼성(21.8%)에 이어 세계 2위다. 화웨이는 지난해 11월 삼성전자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5세대(5G) 폴더블폰’을 출시할 만큼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선진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중국의 임금 등을 바탕으로 삼성, 미국 애플 등 경쟁사에 비해 높은 가격 경쟁력을 보유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그 배후에 중국 정부의 막대한 보조금 및 세제 혜택이 있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는다.
화웨이 측은 지난해 12월 “2018년 기준 정부 보조금이 연매출의 0.2%에 불과하다”며 정부 유착 의혹을 부인했다. 하지만 비상장기업 화웨이가 자체 공개하는 정보가 상장기업 공시(公示) 수준의 신뢰성을 갖는다고 보기도 어렵다. 정부의 전폭적 지원 없이 창업 33년 만에 세계적 대기업이 될 수 있겠느냐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다만 알리바바, 텐센트 등 대부분 내수 비중이 큰 중국 유명 IT기업과 달리 화웨이는 2019년 매출의 41%를 해외 시장에서 거뒀다. 이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야심 차게 추진하는 21세기 육해상 실크로드 프로젝트 ‘일대일로(一帶一路)’와 무관하지 않다.
중국과 국경을 맞댄 서남아시아부터 중동, 아프리카, 유럽으로 이어지는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많은 나라들이 중국과 경제협력을 맺을 때마다 화웨이 통신망을 깔고 스마트폰을 쓴다. 이것이 고스란히 화웨이 매출로 이어진다. 2019년 화웨이 매출에서 유럽·중동·아프리카 비중은 24%를 차지했다.
김한권 국립외교원 교수는 “화웨이는 미중 무역협상에서 미국이 계속 문제 삼고 있는 △국영기업에 대한 정부 보조금 △중국 진출 미국 기업에 대한 기술이전 강요 △지식재산권 보호 등의 문제를 집약적으로 안고 있는 기업”이라며 “미국이 미래 패권경쟁을 위해서라도 화웨이를 무너뜨리는 게 중요하다고 인식하는 듯하다”고 진단했다. 5G·6G, 빅데이터 등 IT 기술 패권을 두고 전쟁을 벌이는 두 강대국의 신경전이 화웨이라는 전선(戰線)에서 폭발했다는 의미다.
●美 제재로 스마트폰 사업 타격
미국의 강도 높은 제재는 효과를 발휘하고 있을까. 지난달 화웨이는 올해 1분기(1~3월) 1822억 위안(약 31조4600억 원)의 매출을 거뒀다고 공개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불과 1.4% 늘었다. 지난해 1분기 매출 증가율이 39%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크게 낮아졌다. 화웨이는 이번 발표에서 순이익 등 이익 지표를 공개하지 않았다.
2019년 기준 화웨이 매출은 크게 △스마트폰 등 소비자사업 부문(54.4%) △통신망 등 기간산업(34.5%), 클라우드와 사내 통신망 등 기업 부문(10.4%), 기타(0.7%)로 이뤄져 있다. 지난해 5월 미국의 블랙리스트 등재와 올해 반도체 규제는 특히 화웨이 스마트폰 사업에 상당한 타격을 안길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제재 후 화웨이는 신제품에서 미국 구글의 정식 안드로이드 운영체계(OS)를 쓰지 못하고 있다. 안드로이드폰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유럽 등에서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2018년 스마트폰 등 화웨이 소비자사업부문의 중국과 해외 매출 비중은 각각 5:5였다. 하지만 2019년 해외 매출 비중이 41%로 줄었다.
미 시장조사업체 카날리스가 이달 초 공개한 ‘2020년 1분기에 잘 팔린 스마트폰 상위 10개 모델’에서 화웨이 제품은 단 1개도 없었다. 애플 ‘아이폰11’이 1800만 대로 1위, 샤오미 ‘홍미노트8’(800만 대), 삼성 ‘갤럭시A51’(600만 대)이 뒤를 이었다. 삼성은 10위 안에 총 4개를 포함시켰고 애플과 샤오미가 각각 3개씩이었다. 점유율 기준으로는 아직 화웨이가 세계 2위 스마트폰 제조기업이지만 고가 신상품 시장에서 별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미국의 반도체 제재 또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일본 닛케이아시안리뷰는 세계 최대 반도체 위탁생산업체인 대만 TSMC가 화웨이의 신규 주문을 거부할 의사를 밝혔다고 전했다.
TSMC는 미국 내에 반도체 공장을 지으라는 트럼프 행정부의 요구도 받아들였다. 서부 애리조나주에 공장을 짓기로 한 것이다.
미 CNBC에 따르면 TSMC는 화웨이 스마트폰 중앙처리장치(AP)에 들어가는 반도체 칩의 98%를 담당한다. AP는 컴퓨터의 중앙처리장치(CPU)에 해당하는 스마트폰의 핵심 부품이다. 박재근 한양대 교수(반도체공학)는 “고가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고성능 AP를 생산할 수 있는 반도체 기업은 전 세계에서 삼성과 TSMC 둘뿐”이라며 “TSMC가 없으면 화웨이 스마트폰 사업 부문이 상당한 타격을 입을 것”으로 진단했다.
●“코로나 발원지” 반중(反中) 정서도 부담
코로나19 사태가 촉발한 반중 정서 또한 화웨이에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중국이 코로나19 정보를 은폐해 전 세계에서 500만 명이 넘는 확진자가 발생하고 약 33만 명이 숨졌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화웨이 또한 이 여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피해가 집중된 유럽 각국이 중국을 보는 눈초리가 곱지 않다. 미국에 맞서 중국과 공동전선을 형성하던 러시아조차 자국 확진자가 30만 명을 돌파하자 중국을 탓하고 있다. 독일 일간지 빌트는 “코로나바이러스는 중국의 최대 수출품이며 시진핑 주석은 코로나19로 결국 몰락할 것”이라는 직격탄을 날렸다. 중국 국가안전부가 지난달 시 주석 등 지도부에 “전 세계 반중 감정이 1989년 톈안먼 사태 이후 최고조에 달했다”고 보고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지난해 영국, 독일, 호주, 뉴질랜드 등 미국의 핵심 동맹국은 미국의 압박에도 5G 사업에 화웨이 제품을 일부 쓰겠다는 태도를 취해왔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올해 초에도 “안보에 영향을 주지 않는 선에서 화웨이를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21일 더타임스는 존슨 총리가 최근 의약용품 등 전략 물자에 대한 중국 의존도를 낮출 것을 지시하며 ‘탈(脫)중국’ 행보를 가시화했다고 보도했다. 지난달 영국 브리티시텔레콤(BT) 역시 자사 핵심 인프라에 화웨이 대신 에릭슨 장비를 쓰기로 했다. 뉴질랜드 최대 이동통신업체 스파크도 최근 화웨이 대신 삼성전자 5G 장비를 사용한다고 밝혔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코로나19와 화웨이를 연계시키려는 의도도 드러냈다. 코로나19 사태를 처리하는 중국의 폐쇄성과 불투명성이 화웨이에도 투영된다는 논리다. 그는 4월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미국은 화웨이 등 중국 공산당의 통신인프라 구축을 허용하면 야기되는 위협을 줄곧 알려왔다. 각국이 코로나19를 계기로 장비를 팔러 오는 화웨이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전방위적 화웨이 압박이 한국 경제에 미칠 영향은 평가가 엇갈린다. 삼성전자는 화웨이와 스마트폰 시장에서 경쟁하지만 동시에 화웨이에 반도체를 납품할 수도 있다. 삼성전자 스마트폰 부문은 일정부분 수혜가 예상되나 D램 등 메모리반도체는 화웨이로의 수출이 감소할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장기적으로는 중국이 반도체 자급 속도를 높일 수밖에 없기에 국내 반도체 업계에 악재라는 의견도 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원은 “미국의 제재로 화웨이가 TSMC 대신 중국 기업에 발주할 수밖에 없다”며 “중국 반도체기업이 필사적으로 제조에 매달리면 중국의 반도체 굴기(堀起) 속도가 빨라져 한국에 손해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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