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볼턴 전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 보좌관의 회고록 ‘그 일이 일어난 방(The Room Where It Happened)’이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외교에서 가장 민감한 정상회담을 둘러싼 비화가 공개되면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의사결정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점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상대가 있는 것이 외교의 특성인지라, 미국 우방을 포함한 세계 각국에서 진실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한때 저승사자로 불리던 볼턴은 지금 트럼프의 물귀신이 돼 재선 가도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사실 회고록은 작가의 주관적 관점에서 작성된다. 그렇기에 볼턴의 회고록 역시 그의 기억과 정치적 입지에 기반해 발간된 것으로 봐야 한다. 역사 서적이 아닌 만큼 진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청와대 역시 사실관계를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볼턴은 잘 알려진 대로 메모광이다. 트럼프를 공격하는 일 말고는 거짓말로 책의 가치를 떨어뜨릴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실이고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가.
누구 말이 옳은지 확인할 수 없을 때는 주변 맥락과 함께 해석해야 한다. 볼턴 회고록에 나온 외교적 행위가 발생했을 당시 한미관계나 북·미 관계, 그리고 남북관계의 과정과 결과를 살펴보면 누구의 말이 더 옳은지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접근을 북핵 문제에 적용하면 볼턴의 주장이 더욱 설득력 있게 보인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제자리걸음을 하는 북핵 협상의 현실을 설명하는 데 논리적으로 부합하기 때문이다.
비핵화는 말뿐이던 싱가포르 회담
볼턴 회고록을 보면 2018년 북·미 싱가포르 정상회담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우리 정부가 미국 측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년 내 비핵화를 할 수 있다는 말에 동의했다”고 전달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정부는 북한의 말을 너무 믿었거나, 북·미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려고 없는 사안을 과장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북한은 지난 20여 년간 비핵화를 입에 담았지만 한 번도 제대로 실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북한이 1년 내 비핵화에 동의했다고 한다면 일단 구체적인 내용을 물어봐야 한다. 영변과 그 밖의 핵시설을 폐기하고, 북한이 보유한 핵물질이나 핵무기를 해외로 반출하는 데는 수년 이상 소요될 수밖에 없다. 북한이 제대로 비핵화를 이행했는지 신고받고 이를 검증하는 데만도 몇 년이 걸릴 수 있다. 김정은은 이를 누구보다 잘 알 텐데 1년 내 비핵화에 동의했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8년 내내 우리 정부는 김정은의 비핵화 결단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그렇다면 김정은은 어떤 말을 했고, 그 말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인 것일까.
볼턴 회고록에는 한국 정부가 미국을 상대로 과장되게 설득한 것으로 나온다. ‘한국이 북한의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핵 폐기)를 설득했고, 북한이 이에 동의했다는 식의 설명을 해왔다’거나 ‘북한이 받을 수 있는 혜택은 비핵화를 완수한 뒤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는 미국에게 절대 유리한 협상으로 북한이 수용했을 개연성이 적은 내용이었다.
2018년 남북은 세 차례 정상회담을 가졌고, 북·미는 한 차례 정상회담을 했다. 그리고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평양을 세 차례 방문한다. 하지만 북한 비핵화 문제는 비핵화 원칙에 합의하는 수준에 머물렀고, 북한이 취한 비핵화 조치는 국제사회의 제대로 된 검증 없이 풍계리 핵실험장을 일방적으로 폭파한 것뿐이었다. 북한의 CVID 거부로 미국이 FFVD(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라는 신조어를 만들었을 정도다. 도대체 김정은은 어떤 말을 했는지, 그 말을 우리 정부는 어떻게 믿고 미국에 전했는지, 아니면 우리 정부가 그런 메시지를 전한 적이 없는데 볼턴이 지어낸 것인지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다.
한편 싱가포르 정상회담 이후 비핵화 협상은 더욱더 난항을 겪게 된다. 한국 정부는 일괄타결 방식이 어려워지자 2019년 2월 하노이 정상회담이 실패로 끝난 후에는 북·미 간 어떤 합의도 좋다는 식의 ‘굿 이너프 딜’(good enough deal·충분히 괜찮은 합의)을 제안했다. 하지만 북한은 제재 완화만 주장하며 비핵화 대화를 거부하고 있다. 북한은 늘 미국을 비난하면서 정작 자신들이 이행해야 할 비핵화 의무는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말뿐인 비핵화가 있었지, 이를 뒷받침할 만한 행동은 없었던 것이 지난 2년 반의 시간이었다.
2019년 2월 말 개최된 하노이 정상회담은 북한이 사실상 핵보유를 굳힐 수 있는 위기의 순간이었다. 당시 북한은 단계적 비핵화라는 명분으로 자신들의 부분적 비핵화 조치에 미국 측의 제재 완화를 받아내는 협상을 시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단계적 비핵화는 북한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는 협상안인데, 북한은 자신들의 핵능력 중 가장 낮은 단계인 핵시설을 먼저 내려놓고 높은 수준인 핵물질과 핵무기는 계속 보유하는 반면, 미국은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강도 높은 대북제재를 먼저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트럼프를 거의 설득할 뻔했던 김정은은 끝내 영변 핵시설과 대북제재를 바꾸지 못한 채 빈손으로 귀국길에 올랐고, 이후 대화에 복귀하지 않고 있다. 만일 하노이에서 트럼프가 제재 완화에 동의했다면 북한은 영변과 기타 핵시설을 대북제재와 바꾸고, 이미 개발해놓은 핵무기와 핵물질은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핵무기와 핵물질은 과거 북한이 밝힌 조선반도 비핵화 개념에 따라 주한미군 철수와 연계시켰을 테고, 북한 외에도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고민하는 미국이 북한의 제안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핵무기를 보유할 명분으로 삼았을 것이다.
볼턴의 주장에 따르면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는 북한과 실무회담을 통해 단계적 비핵화를 추진한다는 내용의 합의문을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 구체적인 내용이 밝혀지지 않아 정확한 협상 조건은 파악하기 어렵지만, 북한이 영변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상당 부분의 제재 완화를 제공하는 협상안이 마련됐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하노이 정상회담 한 달 전 비건 특별대표는 미국 스탠퍼드대 연설에서 북한의 단계적 비핵화를 수용하는 듯한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단계적 비핵화 협상안은 볼턴에 의해 무산됐고,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트럼프는 영변 핵시설 이외의 다른 시설을 집중적으로 물으며 빅딜에 가까운 거래를 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김정은은 영변 이외에는 논의를 거부함으로써 끝내 거래가 실패로 끝나고 만 것이다.
북한을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만들 뻔한 하노이
이 과정에서 트럼프가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우선시했다는 의문도 제기된다. 자신의 탄핵 문제와 관련된 마이클 코언 변호사의 청문회를 보느라 밤을 새운 트럼프는 회담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스몰딜과 걸어 나가는 것 중 뭐가 더 기삿거리가 되겠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만일 트럼프가 국내 정치적 입지 때문에 북한과 거래를 거부하고 회담장에서 걸어 나가는 쪽을 선택했다면 이 역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어느 누구도 정상회담에서 트럼프를 신뢰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 또한 미국과 트럼프를 본격적으로 비난하게 된다면 이 문제를 집중 제기할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하노이 정상회담은 북한 주도의 비핵화 협상이 이뤄질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할 뻔했다. 영변과 대북제재의 핵심 내용을 교환하려는 협상은 좌절되고, 김정은은 자신의 할아버지인 김일성 시대부터 추구해온 ‘핵보유국 지위 확보’의 꿈을 거의 이룰 뻔한 기회가 무산됐다.
판문점 회동과 겉도는 한국 정부
2019년 6월 30일 판문점 남북미 3자 회동에 대해 볼턴은 북한과 미국이 판문점에 문재인 대통령이 참여하는 것을 환영하지 않았다고 전하면서 북·미 양측이 한국을 배제하려는 모습을 보였다고 회고록에 썼다. 한국이 운전자나 중재자가 아니라 오히려 구경꾼으로 전락했음을 시사하는 내용이다. 그래서인지 이 부분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입장은 매우 강경하다. 볼턴은 현장에 있지도 않아서 문 대통령의 역할을 자세히 알 수 없었다는 것이 이유다. 이처럼 청와대는 강력하게 부인하지만, 사실 판문점 회동을 회고해보면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볼턴 회고록에는 판문점 회동에 참여하려는 문 대통령의 모습이 잘 묘사돼 있다. 문 대통령은 트럼프에게 판문점에서 본인이 김정은을 맞이한 후 트럼프에게 인계하고 떠나겠다고 제안했지만 이를 북측이 거절했고, 그러자 다시 트럼프에게 DMZ(비무장지대) 내 오울렛 초소까지 동행하겠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사실 여하를 막론하고 당시 판문점 3자 회동은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
판문점 회동의 성사 배경이 어떻든, 그리고 누가 누구를 반대했든 장소가 판문점 남측 우리 지역이었으면 문 대통령이 주인 노릇을 해야 했다. 적어도 문 대통령이 트럼프를 군사분계선까지 안내하든가, 아니면 남북미 3자 회담을 잠시 갖고 그다음에 북·미 양자 회담을 갖도록 해야 했다. 그래야 소위 운전자니 중재자니 하는, 그간 문재인 정부가 주장해온 내용이 어느 정도 설득력 있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이러한 설득을 하지 못했고, 우리 입장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우리 땅에서 북·미 정상회담을 개최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배짱도 보여주지 못했다. 트럼프나 김정은이나 서로가 필요한 회담이었다면 우리도 나름대로 버티기를 시도할 수 있었음에도 이를 관철해내지 못한 것이다.
볼턴 회고록에 담긴 주장이 얼마나 사실과 부합하는지는 알 수 없다. 미국 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으로 트럼프를 위해 일한 사람이 자신이 모셨던 대통령에게 칼날을 겨누는 것도 좋은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회고록에 담긴 내용을 당시 한미관계와 북·미 관계에 비춰 해석해보면 맥락상 큰 오류는 없어 보인다. 하나하나의 구체적인 사실관계는 다를지 모르지만, 큰 흐름에서 북핵 문제와 한미동맹의 현주소를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지금 정부가 해야 할 시급한 일은 볼턴을 비난하거나 미국 행정부에 항의하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대북정책을 바로잡고 흔들리는 한미동맹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그래야 변화하는 국제환경 속에서 우리의 평화와 번영을 지켜낼 수 있다. 겉모습만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외교로는 정면돌파전을 구호로 내세우며 대외 강경정책을 전개하는 북한을 제대로 다룰 수 없고, 궁극적으로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도 보장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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