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3일 실시되는 미국 대선이 채 두 달도 남지 않은 가운데 부동층 표심을 좌우할 세 차례의 TV토론이 대선의 승패를 가를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집권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야당 민주당 대선후보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 모두 현장 유세를 많이 하지 못해 TV토론이 대선 판세에 미치는 영향이 이전보다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일각에서는 올해 TV토론 시청자 수가 기존 최고치였던 2016년 9월 당시 트럼프 공화당 후보와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의 1차 토론(8140만 명)을 넘어설 가능성이 높다고 점친다.
○ 후보 못지않게 부통령 후보 대결도 관심
트럼프 대통령과 바이든 후보는 이달 29일 중부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첫 TV토론을 한다. 4년 전 대선토론 때도 진행을 맡았던 베테랑 언론인 크리스 월리스 폭스뉴스 앵커가 또 진행을 맡는다. 90분간 6개 정책 분야를 15분씩 쪼개 진행자가 질문을 던지고 양 후보가 대답하는 형식이다. 6개 주제는 월리스 앵커가 직접 선정하며 토론 일주일 전인 22일 양 후보에게 고지한다.
다음 달 15일 열리는 2차 토론은 대선의 최대 격전지로 꼽히는 남부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개최된다. 일반 청중도 질문할 수 있는 ‘타운홀’ 방식이며 스티브 스컬리 시스팬(C-SPAN) 정치에디터가 진행을 맡는다. 여성인 크리스틴 웰커 NBC 앵커가 진행자인 3차 토론은 다음 달 22일 중부 테네시주 내슈빌에서 열린다. 방식은 1차와 같다.
이와 별도로 다음 달 7일에는 마이크 펜스 부통령,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인 카멀라 해리스 상원의원이 서부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에서 격돌한다. 펜스 부통령과 해리스 후보 모두 언변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 대선후보 간 토론 못지않게 관심이 쏠린다.
2008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였던 바이든은 당시 공화당 부통령 후보였던 세라 페일린 알래스카 주지사와 맞붙었다. 부통령 후보 간 대결이었음에도 무려 6990만 명이 지켜봐 역대 부통령 후보 TV토론 시청자 수 최고치를 달성했다. 각각 민주당, 공화당의 대선후보였던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과 존 매케인 상원의원의 1차 토론(5240만 명)보다 약 1750만 명이 더 봤을 정도다. 당시 페일린 후보는 대(對)러시아 정책을 묻는 진행자에게 “알래스카에서도 러시아가 보인다”며 딴청을 피웠다. ‘수준 미달’ ‘정치 희화화’ 등의 비판이 거셌지만 흥행에는 성공한 셈이다.
○ 시청자 수 사상 최고치 경신 가능성
이번 TV토론을 얼마나 많은 시청자가 볼지도 관심거리다. 미 대선후보의 첫 TV토론은 1960년 9월 민주당의 존 F 케네디 후보와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 후보가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진행한 토론이었다. 당시로는 엄청난 수치인 무려 6640만 명의 시청자를 모았다.
영상 매체의 영향력을 간과했던 닉슨은 카메라 앞에 서기 전 메이크업을 거부했다. 2주 전 무릎 부상으로 병원에 입원한 탓에 살이 빠져 셔츠도 헐렁했다. 초췌한 모습으로 무대에 올라선 닉슨은 캘리포니아에서 선거 유세를 하다 와서 건강하게 그을린 케네디의 건강미와 에너지를 당해내지 못했다. 닉슨은 케네디보다 네 살 많았지만 시청자는 그가 훨씬 늙었다고 여겼다. 결국 선거에서도 패했다.
1992년 TV토론에서도 조지 부시 대통령은 토론 중 종종 시계를 들여다보는 등 지겨워하는 모습을 노출했다. 경쟁자 빌 클린턴보다 스물두 살 많았던 그의 ‘노인 이미지’를 더욱 강화시켰다. 선거에서도 대패했다.
1960년 대선 패배로 큰 충격을 받은 닉슨은 1968년과 1972년 대선에 다시 출마했을 때 TV토론을 거부했다. 1964년 대선에서는 민주당 후보로 나선 린든 존슨이 부정적이어서 역시 토론이 성사되지 않았다. 1976년에야 토론이 재개됐고 1988년부터 비영리 민간기구인 대통령토론위원회(CPD)가 행사 주관을 맡아 토론 전반을 관장하고 있다.
서정건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이번 토론이 미 역사상 가장 많은 시청자를 불러 모으는 대선 토론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이번 대선에 꼭 투표하겠다’고 답한 응답자 비율이 4년 전보다 높은 데다, 코로나19로 유권자들이 자신이 사는 곳에서 직접 대선후보를 볼 기회가 사라져 대신 TV토론을 주목할 것이란 의미다.
○ ‘막말 파이터’ vs ‘노회한 모범생’
이렇듯 TV토론의 중요성이 크기에 두 후보 모두 사활을 걸고 있다. 코로나19로 대면 유세를 못했던 바이든 후보는 자신의 비전과 에너지를 과시할 거의 유일한 기회나 다름없다는 각오로 임하고 있다. 백악관 측도 마찬가지다. 최근 지지율 격차가 많이 좁혀지긴 했지만 아직 트럼프 대통령은 전국 단위 지지율에서 바이든 후보에 열세다. TV토론을 통해 전세를 역전하겠다는 투지를 불태우고 있다.
토론에 임하는 두 후보는 여러 면에서 대조적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TV토론은 거칠다. 기존 문법을 무시하고 과장, 부풀리기, 거짓말, 인신공격 등을 서슴지 않는 ‘막말 파이터’에 가깝다. 진행자나 상대방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던지며 화력을 높인다. 4년 전 그는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청중을 향해 발언할 때 주변을 어슬렁대며 불안감을 조성했고, 클린턴 후보의 목덜미 뒤까지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상대방을 위협했다. 토론 상대방을 기겁하게 만들어 위축시키는 이른바 ‘트럼프 걸음(The Trump Walk)’ 전술이다.
단순하고 명확한 메시지를 짧은 문장으로 반복하는 그의 화법도 대중의 뇌리에 깊은 각인을 남긴다. 순발력 또한 뛰어나다는 평이 많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5년 8월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진행자였던 폭스뉴스 앵커 메긴 켈리가 “당신은 싫어하는 여성을 뚱뚱한 돼지, 개, 속물, 혐오스러운 동물이라고 불렀다”며 여성 비하 발언에 대한 답을 요구하자 곧바로 “로지 오도널에 대해서만 그렇게 말했다”고 받아쳤다. 오도널은 체격 좋은 여성 코미디언이다. 인신공격성 발언이었지만 청중은 폭소했고 말문이 막힌 켈리는 추가 질문을 던지지 못했다.
진실이 무엇이건 간에 상대의 약점을 포착해서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올해 토론에서도 비슷한 전략을 고수할 것이란 관측이 많다. 특히 본인보다 네 살 많은 바이든 후보의 건강과 말실수를 집중 공략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물론 바이든 후보 역시 부통령 8년, 상원의원 36년을 지낸 워싱턴 정계의 백전노장이다. 다만 최근 부쩍 말실수가 잦아지고 토론의 맥락을 놓치는 사례가 적지 않아 참모진이 우려하고 있다. 올해 초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토론에서도 실수를 거듭했다. 바이든 후보는 핏대를 세우며 목청을 높이다 돌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잊어버린 듯 갑자기 진행자에게 “내 시간은 끝나지 않았느냐. 왜 나를 제지하지 않느냐”며 입을 닫았다.
다만 역설적으로 기대치가 낮기에 TV토론에서 의외로 선전하면 상당한 호평을 받을 여지가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7일 USA투데이와 서퍽대가 공개한 조사에서 응답자 1000명 중 47%는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 TV토론에서 이길 것”이라고 답했다. 바이든 우세(41%)를 점친 사람보다 많았다. 바이든 후보는 지난달 민주당 전당대회 당시 대선후보 수락 연설에서 매끄러운 태도로 합격점을 받기도 했다.
바이든 후보가 열렬한 지지층, 즉 ‘팬덤’은 트럼프 대통령보다 크지 않지만 격렬한 반대파, 즉 ‘안티’ 또한 많지 않다는 점도 유리한 요소로 꼽힌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의 주요 지지층인 백인 블루칼라 노동자를 겨냥해 자신 또한 펜실베이니아 탄광촌 스크랜턴의 노동계층 출신임을 강조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을 ‘평균적인 조(Average Joe)’라고 칭하며 부유한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난 트럼프 대통령과의 차이를 부각하고 있다.
○ ‘악마의 대변인’ 활용 vs 팩트체크 치중
양측의 토론 전략도 상반된다. 정치매체 폴리티코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 참모들은 8월 초부터 뉴저지주 베드민스터에 있는 대통령의 골프 리조트에 모여 토론 준비를 시작했다. 최측근인 크리스 크리스티 전 뉴저지 주지사, 스티븐 밀러 백악관 선임고문, 빌 스테피언 선거대책본부장, 맏사위 재러드 쿠슈너 백악관 선임고문 등이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바이든 후보가 당황하거나 받아칠 말이 생각나지 않을 때 쓰는 특유의 표현들까지 세세히 분석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6년 대선 때도 마이클 플린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폭스뉴스 앵커 로라 잉그러햄, 장녀 이방카 등이 던지는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토론을 대비했다. 이들은 상대편에 빙의해 일부러 대통령에게 답변하기 힘든 질문을 던져 임기응변 능력을 키워주는 ‘악마의 대변인(devil‘s advocate)’ 노릇을 했다. 이번 대선에서도 마찬가지 역할을 할 것으로 알려졌다.
바이든 캠프 측은 TV토론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수시로 거짓말과 왜곡된 근거를 들이댈 가능성에 대비해 실시간 팩트체커 스크린을 사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바이든 후보 본인이 트럼프 대통령과 일대일로 맞붙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피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바이든이 토론회장에 나타날지조차 의문”이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조롱에 정면으로 대응하겠다는 취지다.
○ 토론 후 여론이 지지율에 결정적 영향 미쳐
올해 내내 트럼프 대통령과 바이든 후보는 지지율이 엎치락뒤치락했다. 2월까지는 현직 대통령의 우세가 뚜렷했지만 코로나19 창궐, 경제지표 악화 등으로 트럼프 행정부의 실정이 부각되자 3∼7월에는 바이든 후보가 압도적 우세를 보였다.
하반기 들어 주식시장이 호조를 나타내고 코로나19 역시 최악의 국면을 지났다는 평가가 늘어나면서 트럼프 대통령 측이 격차를 바짝 좁히고 있다. 3∼7월 주요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50%를 넘었던 바이든 후보는 8, 9월 조사에서는 40%대 후반으로 내려왔다.
반면 한때 30%대로 떨어졌던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율은 40% 중후반대로 반등했다. 표본오차를 감안하면 바이든 후보와 사실상 별 차이가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서정건 교수는 “세 차례의 TV토론을 모두 끝까지 보는 사람은 거의 없기에 토론 당시의 언변과 답변 능력보다는 끝난 후 어느 쪽에 유리한 여론이 형성되느냐가 판세를 좌우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어 “TV토론이 도입 초기와 달리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하고 후보의 자질을 평가하는 기능보다는 쇼 비즈니스의 수단으로 변질된 측면이 있다”며 “소위 ‘짤방’ ‘가차 모먼트(gotcha moment)’ 등으로 불리는 특정 후보의 실수나 웃긴 장면이 온라인과 소셜미디어에서 얼마나 회자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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