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시대에 재택근무를 장기적으로 채택하는 회사들이 늘고 있습니다. 기업들은 경영효율 측면에서 재택근무를 좀 더 세밀하게 들여다보기 시작했죠.
그런 점에서 세계 기업 트렌드를 선도한다는 미국 실리콘밸리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실리콘밸리 재택근무의 특징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한계선 전략’입니다. ‘일정 선까지는 적극 지지하지만 이를 넘으면 직원 입장에서 불이익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죠.
실리콘밸리에서는 전 직원을 대상으로 재택근무를 허용하는 곳들이 많습니다. 풍족한 실리콘밸리답게 재택근무를 지원하는 수당까지 지급합니다. 컴퓨터 설치 등 ‘홈오피스’를 꾸밀 수 있도록 돈까지 준다는 의미죠. 페이스북은 2000달러(한화 약 230만 원), 구글은 1000달러, 좀 더 작은 기업들은 500달러 정도 준다고 하네요.
여기에 육아수당까지 올린 곳들이 많습니다. 미국은 재택근무도 근무의 한 방식이라는 의식이 철저한데요. ‘재택근무를 하는 김에 코로나19 때문에 등교하지 못한 자녀 돌봐라’는 생각은 있을 수 없죠. 돈을 더 주거나, 휴일을 늘려주는 방식으로 ‘차일드케어’ 수당을 올렸습니다. ‘세일즈포스’라는 중견 정보기술(IT) 인력회사는 육아휴직을 연 4주에서 6주로 늘리고, 매달 하루에 100달러씩 5일치를 육아보조금으로 신설해 대상 직원들에게 지급합니다.
직원 입장에서는 좋은 일입니다. 탄력적으로 시간을 활용할 수 있는 재택근무를 하면서 이런 저런 수당까지 받으니까요. 하지만 좋은 건 여기까지입니다.
최근 실리콘밸리에서는 ‘급여 지역화(pay localization)’ 정책을 도입하는 회사들이 늘고 있습니다. 무슨 행정용어 같지요. 쉽게 말해 재택근무 직원이 회사에서 멀리 떨어져 살수록 월급을 깎는다는 얘기입니다.
‘VM웨어’라는 소프트웨어 회사를 볼까요. 샌프란시스코 인근 팔로앨토에 본사를 둔 이 회사는 코로나19가 발생한 뒤, 예컨대 물 좋고 경치 좋은 콜로라도 주 덴버로 이사를 간 직원은 연봉의 18%를 깎았습니다. 같은 캘리포니아 주 내에서도 로스앤젤레스나 샌디에이고로 이사 간 직원은 8%를 깎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느냐고요? 아시다시피 코로나19는 밀집 지역일수록 감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다보니 인구 밀도가 낮은 곳으로 이사 가는 직장인들이 급증하고 있죠. 동부에서 뉴욕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다면 서부 쪽에서는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모여 있는 샌프란시스코 일대에서 거대한 이동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물가가 비싼 곳이 바로 샌프란시스코입니다. 뉴욕보다 더 비싸죠. 특히 집값이 살인적으로 높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IT 기업들이 집중된 샌프란시스코 베이에어리어 주민들의 평균 소득은 연 11만2000달러(약 1억2900만 원)입니다. 미국 평균보다 월등히 높죠.
하지만 이렇게 경제수준이 높은 실리콘밸리 직장인들도 집값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한 부동산업체 조사에 따르면 샌프란시스코 일대에서 집을 사려면 연소득으로 최소 17만2000달러(1억9000만 원)는 벌어야 한다고 하네요. 미국 직장인들의 대표적인 채팅 앱인 블라인드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실리콘밸리 직장인의 70%는 ‘집값을 감당할 수 없다’고 답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코로나19를 기회 삼아 인구 밀도가 낮고 물가도 싼 타 지역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습니다. 이제 재택근무로 매일 출근 도장을 찍어야 할 필요도 없으니 이사 가는데 제약이 없죠.
경영자 입장에서는 생활비가 싼 곳으로 이동하면 급여를 깎는 것은 당연하다는 입장입니다. 들리는 얘기로는 이렇게 급여 삭감으로 확보한 예산으로 육아보조금, 홈오피스 설치 비용 등 앞에서 거론한 특별수당을 지급한다고 합니다.
월급 차등 정책을 도입한 회사가 워낙 많다보니 ‘급여 지역화’라는 새로운 용어도 나온 것이죠. 페이스북도, 트위터도 이를 도입했습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 출중한 대형 IT 기업들은 코로나19 이전부터 이 정책을 만들어놓고 있었죠. 다만 활용 수준이 매우 미미했었는데 이제 본격 가동하고 있는 셈이죠. 페이스북, 트위터는 내년 1월부터 ‘급여 지역화’ 정책을 실시한다고 합니다. 다만 급여 삭감은 워낙 민감한 문제여서 이 정책을 대놓고 홍보하는 기업은 별로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회사에서 멀리 이사를 가는 불이익을 감당하겠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요. 하지만 놀랍게도 절반 가까이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채팅 앱 블라인드가 샌프란시스코, 뉴욕, 시애틀 직장인 28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44%가 ‘물가가 싼 곳으로 이사하는 대신 급여가 줄어도 괜찮다’고 답했습니다.
계산법은 이렇습니다. 삭감이 이뤄지는 부분은 ‘기본급’입니다. 하지만 실리콘밸리는 워낙 보너스 같은 수당이 많은 곳입니다. 기본급과 기타수당이 절반 정도씩이라고 보면 됩니다. 기본급에서 10% 정도 깎여도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생활비와 세금이 20% 정도 싼 곳으로 이사 가는 것과 비교했을 때 오히려 ‘남는 장사’라는 결론이 나온다는 것이죠.
물론 재택근무 자체를 선호하지 않는 실리콘밸리 기업도 아직 꽤 있습니다. 넷플릭스는 최고경영자(CEO)가 나서서 “재택근무 왜 합니까”라고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전면적인 재택근무가 아닌 일주일에 절반 정도만 출근하는 절충안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재택근무인 것만큼은 확실해 보입니다. 집값 하면 치를 떠는 우리나라에서도 언제 ‘급여 지역화’ 개념이 본격 도입될지 두고 봐야겠습니다. 일 닥친 뒤 급히 계산기 두드려볼 것이 아니라 미리미리 고민해두는 게 낫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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