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패배 불복 와중에 미국인들을 웃게 만든 사건이 있었습니다. 단순히 웃고 지나갈 게 아니라 뒤죽박죽 상태인 미국 정치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대선 후 소송전을 개시하던 무렵 트럼프 대통령이 트윗을 올렸습니다. “내일 주말 아침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 포시즌즈에서 기자회견 열림. 참석 바람.” 기자회견 앞에 ‘대규모(big)’라는 단어를 두 번이나 써가며 기대감을 높였죠. 대선 패배 후 저기압 모드였던 트럼프 대통령이 모처럼 신이 나 트윗을 올렸으니 기자들은 포시즌즈 호텔에 “회견이 예정돼 있느냐”고 전화를 겁니다. 그러나 트럼프 진영으로부터 회견장 예약이 없었던 포시즌즈 호텔은 오히려 “이게 뭔 소리?”라는 반응을 보이죠.
회견 장소에 대한 의문은 당일 아침 풀립니다. 트럼프 측은 “오늘 회견은 ‘포시즌즈 토털 랜드스케이핑’이라는 조경회사에서 열린다”고 기자들에게 수정 문자를 보냅니다. “웬 조경회사?”라는 의문을 가진 기자들이 삼삼오오 지정된 장소에 집결합니다.
도착해보니 특급 호텔 포시즌즈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필라델피아 슬럼가에 있는 조그만 조경회사. 이 때부터 기자들의 관심사는 ‘기자회견에 누가 나오느냐’ ‘무슨 얘기를 하느냐’가 아니라 ‘왜 이런 곳에서 기자회견이 열리나’로 옮겨갑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변을 둘러보니 기자회견 장소로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죠. 한쪽으로는 성인용품 상점, 다른 한쪽으로는 화장장 사이에 끼여 있는 조경회사, 그것도 회사 내부 사무실이 아닌 야외 주차장에서 기자회견이라뇨.
그런데 정말 기자들 사이를 뚫고 루돌프 줄리아니 트럼프 대통령 개인 변호사 겸 전 뉴욕 시장이 등장합니다. 줄리아니 하면 트럼프 대통령의 ‘심복’ 아니겠습니까. 뒤로는 급조한 무대를 배경으로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화려한 경력의 트럼프 법률팀이 쭉 도열해 있습니다. 줄리아니는 새로울 것이 없는 “이번 선거는 사기다” “부정선거다”라는 주장을 펴기 시작합니다.
열변을 토하는 사이 펜실베이니아 개표가 끝나고 언론사들은 일제히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 승리’라고 공식 발표를 합니다. 기자들은 수군거리며 더 큰 뉴스가 나올 바이든 선거본부로 발걸음을 옮기죠. 기자들이 왜 떠나는지 모르는 줄리아니는 주변에 물어보고 “모두들 바이든이 승자래요”는 대답을 듣습니다.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라 당황하던 줄리아니는 역시 드라마적 연출에 강한 면모를 보이며 수습에 나섭니다. 회견 도중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오 신이시여, 언제부터 네트워크(방송사)들이 승자를 결정했습니까. 법정에서 결판이 나야지요”라며 울부짖습니다.
배경, 등장인물, 타이밍, 스토리라인 등이 모두 4차원스러운 이 한 편의 드라마는 CNN 등 언론사들에 의해 주말 아침 생중계됐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기자회견 장소 예약을 담당하는 트럼프 진영 말단 직원의 ‘실수’로 발생한 일이라고 합니다. 웬만한 거짓 트윗은 지우지 않은 트럼프 대통령도 포시즌즈 트윗은 창피했던지 삭제해 버렸습니다.
그러는 사이 이 조경회사는 소셜미디어에서 최고 검색어로 등극하며 수많은 유머의 소재거리가 됐습니다. CNN의 잭 태퍼라는 앵커는 “트럼프타워의 금빛 엘리베이터에서 시작된 트럼프의 대통령 야망이 결국 포르노샵 부근 동네에서 막을 내렸다”고 비꼬기도 했죠. 성인용품 상점 주인까지 조연으로 등장해 기자들의 인터뷰 공세에 “트럼프도 자기가 진 줄 알아, 알고 말고”라며 혀를 찹니다.
이 사건은 작게 보면 한 말단 직원의 실수지만 크게는 트럼프 법률전략의 대전환을 의미한다고 미 언론은 지적합니다. 패배를 예감한 트럼프 진영은 이미 6월부터 백악관 법률팀을 가동해 소송 전략을 수립했다고 하죠. 이곳저곳에서 소송을 벌이는 것이 간단해 보일지 몰라도 사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 일입니다. 각 주마다 제각각인 선거관련 법률을 알아야 하고, 주의 대표적인 로펌들을 소송 대리인으로 선정하고, 부정선거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들을 선거 핫라인으로 모아 해당 법정에 자료로 제출해야 하는 복잡한 과정입니다. 올 6월에 시작했어도 늦은 감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트럼프 진영 핫라인에 40여명이 근무한다고 하는데 턱도 없이 작은 인원입니다. 장난전화를 골라내야 하고, 설사 부정이 개입했다 하더라도 선거를 무효화할 수 있을 만큼 조직적인 규모로 이뤄졌는지 판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줄리아니의 등장은 의미가 있습니다. 주마다 각개전파로 진행돼온 소송전에서 이제 발을 빼겠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대부분이 ‘함량미달’인 소송을 대량으로 전개한 뒤 ‘걸리는 것이 있으면 다행’이라는 주먹구구식 전략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것을 누구보다 트럼프 대통령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줄리아니가 법률 총책임자로 전면에 나섰으니 앞으로는 대규모 대중집회와 언론을 통한 부정선거 호소에 더 집중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물론 이런 대중선동 전략도 ‘약발’은 오래 가지 않겠죠.
이름도 낯선 ‘포시즌즈 토털 랜드스케이핑’ 사건을 보면서 많은 미국인들은 “트럼프 시대가 정말 막을 내리는구나”라고 직감했을 겁니다. 대선 불복 몽니를 부리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얘기죠. 혼란의 미국에 부조리 코미디극을 선사한 사건으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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