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부인 질 여사(69)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미 최초의 박사 출신 대통령 배우자이자 노던버지니아 커뮤니티칼리지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그는 줄곧 “백악관에 입성한 후에도 교직을 유지하며 백악관에서 출퇴근하겠다”고 밝혀 왔다. 전무후무한 ‘직업을 지닌 퍼스트레이디’의 탄생을 앞두고 대통령 배우자의 역할과 위상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대통령 배우자는 선출직도 임명직도 아니어서 법이 정한 책임과 권한이 따로 없다. 하지만 세계 최고 권력자와 늘 함께하는 만큼 영향력은 막강하다. 대통령의 정책 결정에 어떤 식으로든 입김을 미치고 미국을 대표하는 외교사절 노릇도 한다. 각자의 개성과 능력으로 뚜렷한 존재감을 남긴 미 퍼스트레이디의 면면을 살펴본다.
○ ‘레이디’에서 ‘퍼스트레이디’로
미 건국 초기 워싱턴 정계에는 영국 귀족문화의 영향이 짙게 남아 있었다. 당시 대통령 배우자의 호칭은 영국 귀족의 아내를 뜻하는 ‘레이디(Lady)’였다. 초대 조지 워싱턴 대통령의 아내 마사는 ‘레이디 워싱턴’, 제2대 존 애덤스 대통령의 부인 애비게일은 ‘레이디 애덤스’로 불렸다.
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퍼스트레이디’ 용어는 1848년 등장했다. 제12대 재커리 테일러 대통령이 한 연설에서 제4대 제임스 매디슨 대통령의 부인 돌리 여사를 ‘우리 땅의 퍼스트레이디’라 칭한 것이 시초다. 이후 언론이 받아쓰면서 ‘대통령 부인=퍼스트레이디’ 공식이 자리 잡았다.
미 정치사학 전문가인 리사 번스 메릴랜드대 교수는 대통령 배우자의 역할이 ‘여성 공인’(1900∼1929년)→‘정치와 관련 있는 유명인’(1932∼1961년)→‘정치 활동가’(1964∼1977년)→‘정치 참모’(1980∼2001년) 식으로 변해 왔다고 평가했다.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1884∼1962)는 그림자 내조에 그쳤던 이전 퍼스트레이디와 달리 사회 운동가, 로비스트, 정책 참모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며 새로운 배우자 상(像)을 제시한 인물로 꼽힌다. 남편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4선 대통령을 지내는 동안 그 역시 뉴딜 정책을 홍보하고 인권과 교육 개혁에 관한 강연 및 기고에 적극 나섰다. 1940년 민주당 전당대회 때는 남편의 대선후보 선출을 촉구하는 연설을 했고, 남편이 타계한 후에는 유엔 인권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며 1946년 세계 인권선언 작성에 깊이 관여했다.
백악관 내 대통령 부인의 공간은 1901년 처음 등장했다. 제26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 이디스 여사(1861∼1948)가 사교 모임을 준비하기 위해 백악관 내 별도 공간을 만들었다. 1970년대 후반 지미 카터 대통령의 부인 로절린 여사(93)가 백악관 동관에 정식 집무실을 마련했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 무보수 명예직… 의상도 사비로 마련
퍼스트레이디는 급여를 받지 않는다. 일정 금액 이상의 선물조차 받지 못하도록 한 미 국가윤리법 때문이다. 미 타임지에 따르면 한때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 측이 이 규정에 반대했지만 지지 여론이 높지 않아 공론화를 시키지 못했다.
이 때문에 의상, 머리 손질, 화장 등 스타일링에 관한 비용 역시 사비로 마련해야 한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부인 로라 여사(74)가 “의상비가 엄청나게 들어 매우 놀랐다”고 언급했던 이유다. 오바마 대통령의 부인 미셸 여사(56)가 백악관 안주인 시절 공식석상에서 제이크루, 갭 등 중저가 브랜드의 옷을 즐겨 입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미국 상품을 널리 홍보하고 서민적 이미지를 심어주려는 목적 외에 엄청난 의상비를 줄이려는 현실적 이유가 있었을 것이란 분석이다.
다만 퍼스트레이디 보좌진 월급, 사회봉사 캠페인 추진 비용 등 공적 업무에 관한 비용은 전액 정부가 지급한다.
퍼스트레이디 업무를 돕는 직원을 처음 채용한 사람은 이디스 여사다. 그는 이저벨라 하그너란 여성을 고용해 사교모임 준비를 맡겼다. 현재 백악관 사회비서관이 하는 업무와 비슷하다. 엘리너 여사는 개인 비서를 처음 뒀고,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부인 재클린 여사(1929∼1994)는 퍼스트레이디를 전담하는 언론 담당 비서관직을 신설했다. 이후 초대 담당 보좌관, 연설문 담당 보좌관, 퍼스트레이디 비서실장, 특별기획국장 등의 자리가 생겨났다.
1990년대 이후 퍼스트레이디를 돕는 직원은 15명 정도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부인 멜라니아 여사(50)는 비서실장 겸 언론 담당 비서관, 소통비서관, 정책비서관, 일정비서관, 주방장, 화훼 디자이너 등 11명을 거느리고 있다.
○ 국무회의 참석·해외 순방·인사 등 막후 권력자
20세기 후반의 퍼스트레이디들은 남편의 정치적 동반자 혹은 남편 못지않은 야망 넘치는 정치가 역할을 자처했다. 로절린 여사는 다소 우유부단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카터 대통령과 달리 강단 있고 똑 부러지는 이미지로 유명했다. 백악관 비밀경호국이 그를 지칭하는 이름, 즉 코드네임이 ‘댄서’였을 정도로 활동적인 성격이었다.
우울증, 공황장애, 조현병 등 각종 정신건강 문제를 공개적으로 밝히는 게 쉽지 않았던 1970년대 후반 그는 대통령 정신건강위원회의 명예위원장을 지냈다. “모든 사람들이 단순히 ‘미친 사람’으로 불리는 대신 자신의 정신건강 문제를 스스럼없이 인정하고 정부 지원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소신이었다. 다만 관련 법안을 통과시키는 과정에서 일부 국무회의에 참석해 부적절하다는 비판도 받았다.
또한 그는 1977년 남편 대신 미 대표단을 이끌고 중남미로 단독 순방을 떠나 각국 지도자를 만났다. 한 해 뒤에는 바티칸에서 열린 교황 바오로 6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 기간 동안 남편이 백악관을 지키고 있었다.
레이건 대통령의 부인 낸시 여사(1921∼2016)의 영향력도 상당했다. 그는 남편이 1976년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패하자 새 참모진을 꾸리는 데 깊이 개입했다. 결국 레이건 대통령은 4년 뒤 대선후보로 선출됐고 백악관 주인이 됐다. 1986년 미국이 적성국 이란에 몰래 무기를 판 사건인 ‘이란-콘트라 스캔들’ 때도 당시 백악관 비서실장이었던 도널드 리건을 사퇴시켜 여론을 진화하라고 종용했다. 당시 레이건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를 할 때도 그가 적극 건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85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회담 때는 남편에게 ‘산책 회담’을 제안했다. 남편이 알츠하이머로 투병하다 숨지자 알츠하이머 예방 캠페인을 펼쳤다.
○ ‘슈퍼 퍼스트레이디’의 탄생
42대 빌 클린턴 대통령의 부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73)은 석사 학위를 지닌 최초의 대통령 배우자다. 명문 여대 웰즐리대를 졸업하고 남편과 같은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한 그는 백악관 안주인 시절 ‘빌러리’(빌+힐러리)란 신조어를 탄생시킬 만큼 주체적으로 활동해 ‘슈퍼 퍼스트레이디’란 평가를 받았다. 남편 또한 1992년 대선 당시 ‘나를 찍으면 대통령감 하나를 공짜로 더 얻는다’는 소위 ‘투 포 원 프라이스(two for one price)’를 널리 홍보했다.
그는 백악관 동관에 있던 대통령 배우자 사무실을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서관으로 옮겼다. 남편과 마찬가지로 서관에 집무실을 둔 유일한 퍼스트레이디였다. 후임자 로라 여사는 이를 다시 동관으로 옮겼지만 이것만 봐도 클린턴 전 장관의 퍼스트레이디 시절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그는 고용주가 피고용인의 건강보험에 더 많은 돈을 내는 것을 골자로 하는 클린턴 행정부의 건강보험 개혁안 작업도 주도했다. 선출직도, 의료 전문가도 아닌 변호사 출신 퍼스트레이디가 이를 주도한다는 것을 곱지 않게 본 여론으로 한때 인기가 급락했고 법안 통과 역시 실패했지만 남편의 성추문 탄핵 사건으로 인기가 반등했다.
그는 남편 퇴임 후 거물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상원의원(뉴욕), 오바마 1기 행정부의 국무장관을 지냈고 2016년 미 최초의 여성 대통령 후보가 됐다. 그가 바이든 행정부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역할을 할 것이란 관측 또한 끊이지 않는다.
미셸 여사 역시 프린스턴대와 하버드대 로스쿨을 졸업한 엘리트 법조인이다. 백악관 입성 전 시카고대병원 행정부원장을 지냈고 백악관 안주인이 된 후 아동 비만방지 캠페인 ‘레츠무브’, 빈곤층 여학생 지원 캠페인 ‘렛걸스런’ 등을 진행했다. 남편 퇴임 후 그가 쓴 자서전 ‘비커밍’은 전 세계에서 1400만 부가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됐다. 정계 입문설을 부인하지만 그가 클린턴 전 장관과 마찬가지로 언젠가는 독자 정치 노선을 걸을 것이란 관측이 끊임없이 제기된다.
○ 주목받았던 세컨드레이디
질 여사처럼 세컨드레이디에서 퍼스트레이디가 된 인물도 있다. 제38대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부인 베티 여사(1918∼2011)다. 남편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자진 하야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후임자가 되자 그 역시 백악관 안주인이 됐다.
베티 여사는 퍼스트레이디 중 보기 드문 ‘흙수저’다. 부유층 출신이거나 본인의 능력으로 엘리트 계층에 편입한 다른 대통령 배우자와 달리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10대 시절부터 무용수 일을 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알코올의존증자인 보험 판매원 출신 첫 남편과 이혼한 후 촉망받는 하원의원이었던 초혼의 포드 대통령을 만났다.
그가 백악관 안주인이 되자 ‘격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일부 있었지만 자신의 유방암 투병 및 절제 사실을 공개하고 예방 캠페인을 적극 벌여 국민의 호감을 얻었다. 특히 미 전역에서 여권 운동이 활발했던 당시 남녀동등 헌법 개정안(ERA), 여성 낙태권 등을 적극 옹호해 여성계의 고른 지지를 받았다. 타임지는 1975년 그를 ‘올해의 여성’으로 선정했다. 백악관을 떠난 후에는 자신의 약물중독 사실 또한 공개했다. 1982년 캘리포니아주에 약물중독 치료 시설 ‘베티포드 센터’를 설립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부통령을 지낸 딕 체니의 부인 린 여사(79)는 퍼스트레이디 못지않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컨드레이디로 이름을 떨쳤다. 남편이 부시 정권의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로 꼽혔던 것처럼, 그 역시 그림자 내조에 주력했던 로라 여사와 달리 워싱턴 정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매디슨 위스콘신대에서 19세기 영국 문학으로 박사 학위를 딴 그는 세컨드레이디가 되기 전 레이건 행정부에서 보건사회복지부 차관을 지냈고 조지 부시(아버지 부시) 행정부에서 문화재청장, 백악관 환경위원장을 지낸 고위 관료 출신이다. 크리스천 베일이 주연한 2018년 영화 ‘바이스’는 남녀의 전통적 성 역할이 뒤바뀐 체니 부부의 관계, 이 부부가 부시 행정부에서 어떻게 사실상의 최고 권력자로 군림했는지를 상세히 묘사했다. 앨 고어 전 부통령의 부인 티퍼 여사(72) 역시 남편의 부통령 시절 활발한 대외 활동을 벌였지만 2010년 이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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