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도 AOC도 꽂혔다…‘프롭22’ 대체 뭐길래? [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2월 15일 14시 00분


조 바이든 행정부 집권을 앞둔 미국에서 ‘프롭22’가 화제입니다. 정치인들은 서로 암호를 주고받듯이 “프롭22”라고 수군댑니다. 워싱턴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AOC’라는 이니셜로 더 잘 알려진 젊은 여성 정치인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도 “프롭22” 얘기만 나오면 열을 올립니다. ‘프롭22’가 뭐기에 그럴까요.

뛰어난 이슈 선점력과 연설력, 외모 등으로 화제를 몰고 다니는 미국 연방 하원의원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요즘 그녀는 “프롭22”를 자주 화제에 올린다. CNN
뛰어난 이슈 선점력과 연설력, 외모 등으로 화제를 몰고 다니는 미국 연방 하원의원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요즘 그녀는 “프롭22”를 자주 화제에 올린다. CNN
미국은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뽑는 간접선거 방식을 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직접선거로 민의를 반영하는 시스템도 있습니다. ‘주민발의’ 제도죠. 이건 주 단위로 운영됩니다. 주에서 논란이 되는 사안에 대해 주민들이 의견을 모아 발의하면 직접선거로 찬반 투표를 하는 겁니다. 통과되면 주 헌법으로 제정 또는 개정됩니다.
이 제도가 활성화된 주가 있고 안 된 주가 있습니다. 가장 활발하게 운영되는 주는 캘리포니아입니다. 지난달 대선 때 캘리포니아 주민들이 TV에서 지겹도록 본 정치광고는 조 바이든-도널드 트럼프 유세 광고가 아닙니다. ‘프롭22’ 광고입니다. 주민발의는 영어로 ‘프로포지션’ ‘이니셔티브’ 등으로 불립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프로포지션,’ 줄여서 ‘프롭’이라고 하고, 그 뒤에 해당 안건의 행정번호를 붙입니다.

지난달 미 대선 때 캘리포니아에서 관심의 초점이었던 주민발의 안건 ‘프롭22.’ 플랫폼 경제 시대의 근로조건이 새로운 논란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새너제이머큐리뉴스
지난달 미 대선 때 캘리포니아에서 관심의 초점이었던 주민발의 안건 ‘프롭22.’ 플랫폼 경제 시대의 근로조건이 새로운 논란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새너제이머큐리뉴스
대선이 있던 날 캘리포니아 주민들은 ‘프롭22’를 포함한 12건의 주민발의 안건에 표를 던지기 위해 투표소로 향했습니다. 관심의 초점은 ‘프롭22’ 통과 여부. 결과는 58%의 지지를 얻어 통과였습니다. 그런데 이 안건은 내용이 좀 독특합니다. 주민발의에서는 동성결혼, 낙태 등 주로 윤리적인 이슈들이 많이 다뤄지는데 반해 이 건은 매우 테크니컬하고 지엽적인 이슈였죠. 하지만 협소하게 보이는 외관과는 달리 미국 경제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 그리고 그 안에서 발생하는 근로자의 법적 지위 논란을 정조준한 안건이라는 평가가 많았습니다.

‘프롭22’의 핵심 내용은 올해 초부터 캘리포니아 주에서 시행되고 있는 ‘AB5 법’의 예외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AB5 법’은 플랫폼 근로자들을 정직원으로 고용하는 것을 의무화하고 있습니다. 트럼프 시대에 실리콘밸리는 몸조심하기 바빴지만 ‘AB5 법’은 그대로 둘 수 없다는 분위기가 강했죠. 우버, 리프트 등 공유경제 기업들이 ‘프롭22’ 발의를 주도했고, 인스타카트 등 신선식품 배달업체들도 합세했습니다. 기업으로서는 정직원으로 대우하면 최저임금, 고용보험, 유급휴가 등을 보장해야 하므로 비용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죠. 실리콘밸리는 부랴부랴 주민발의를 통해 ‘AB5 법’에 각종 예외조항을 만들어 플랫폼 근로자들을 직접 고용직원이 아닌 독립적 개인사업자로 규정하도록 한 것입니다.

요즘 ‘공유경제’ ‘플랫폼 근로자’ 같은 단어를 모르면 안 되는 시대입니다. 디지털 플랫폼을 매개로 단기간 근로가 이뤄지는 경제형태입니다. 미국에서는 ‘긱 이코노미’ ‘긱 워커,’ 또는 그냥 ‘긱’이라고 부릅니다. 미국은 이미 ‘긱’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올해 노동인력의 35%가 “프리랜서” “계약근로자” “플랫폼노동자” “우버드라이버” 등 뭐라고 불리던 간에 ‘긱 이코노미’에 종사한다는 경제잡지 포브스 조사결과가 있습니다. 2023년에는 노동인력의 절반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건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발발 전 예측이니 지금 조사한다면 그 비중은 훨씬 더 높겠죠. 한국에서는 아직 협소한 범위에서 사회적 논의가 진행되고 있기는 합니다만 ‘배달의 민족’ 같은 플랫폼 근로자나 일반 택배 노동자의 근로조건이 문제가 되고 있죠.

‘프롭22’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우버와 리프트가 근로자의 권리를 약화시키고 있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CBS8뉴스
‘프롭22’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우버와 리프트가 근로자의 권리를 약화시키고 있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CBS8뉴스
실리콘밸리는 ‘프롭22’를 통과시키기 위해, 노동관련 단체들은 이를 막기 위해 치열하게 맞붙었습니다. 우버 등은 홍보와 로비 비용으로 2억 달러(2180억 원 정도)를 썼다고 합니다. 캘리포니아 역사상 가장 많은 돈이 들어간 투표였습니다. 뉴욕타임스가 “주지사나 상하원 선거도 아닌 일개 주민투표에 이렇게 돈을 쏟아 부은 사례가 없다”고 평할 정도였으니까요. 우버는 주민투표를 앞두고 15시간 이상 일하는 근로자에 대해서는 건강보험과 고용보험 혜택을 주겠다는 선제적 양보안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이제 주무대는 캘리포니아에서 워싱턴으로 옮겨갔습니다. ‘프롭22’ 통과 다음날 우버 경영진은 “이 모델을 미 전역에 적용시킬 수 있은 방안을 찾겠다”고 밝혔습니다. 다른 주에서 주민발의를 통해 비슷한 안건이 올라오거나 연방 의회 및 주 의회 차원에서 안건이 상정되면 통과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말이죠. 벌써 ‘프롭22’는 미 정치권의 핫이슈가 됐습니다. 민주당 내 진보세력의 얼굴마담 격인 오카시오코르테스는 “캘리포니아 정치에 참견한다”는 비난을 들으며 ‘프롭22’ 통과 저지에 힘을 썼습니다만 별로 효과를 내지 못했죠. 배달 근로자들이 많은 뉴욕 브롱크스와 퀸즈 구역을 지역구로 둔 그녀는 “바이든 행정부에서 실리콘밸리 ‘빅 테크’ 기업들의 영향력이 점점 더 커질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바이든 당선자가 가장 먼저 부딪힐 문제 중의 하나는 급변하는 경제 속에서 적절한 근로권의 범위를 찾는 일이 될 것입니다. 연방의회 차원에서는 올해 9월 일부 민주당 상하원 의원들 주도로 플랫폼 근로자들에게 최저임금 건강보험 등을 보장하는 법안을 발의해 놓은 상태입니다. 대선 때 실리콘밸리와 노동단체들의 지지를 동시에 얻은 바이든으로서는 이들 간에 이해관계 균형을 맞추기가 쉽지만은 않을 겁니다. 다른 나라들이 이를 지켜보고 있죠.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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