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27일부터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접종을 시작했다. 그런데 누적 확진자가 260만 명이 넘는 프랑스의 접종 속도가 유독 더디다. ‘백신 선구자’ 루이 파스퇴르(1822~1895)의 나라임에도 정부 보건정책과 의료업계 전반에 대한 강한 불신이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공영방송 프랑스앵포에 따르면 접종이 시작된 이후 3일간 프랑스의 전체 접종자는 119명뿐이다. 같은 기간 독일의 백신 접종자는 4만1962명으로 프랑스의 350배가 넘는다. 프랑스 인구가 6500만 명으로 독일(8400만 명)보다 적다는 걸 감안해도 선뜻 이해하기 힘든 수치다. 프랑스는 EU 회원국 중 확진자가 가장 많은 나라다. 이 때문에 백신 접종자가 적으면 EU 전체의 방역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프랑스의 백신 거부 정서는 주요국 중 최고 수준이다. 지난달 여론조사업체 입소스가 영국 독일 스페인 중국 캐나다 등 15개 나라 국민의 코로나19 백신 접종 의향을 조사했는데 프랑스에서는 ‘백신을 맞겠다’는 사람이 40%로 15개국 중 가장 낮았다. 중국(80%) 영국(77%) 독일(65%) 등에 크게 못 미쳤다. 백신을 맞지 않겠다는 프랑스인은 ‘부작용 우려’(51%), ‘백신이 효과가 없을 것’(19%)이란 이유를 주로 댔다.
2009, 2010년 신종플루 사태 당시 프랑스 정부는 9400만 회를 접종할 수 있는 백신을 주문했다. 이 백신은 성인 1회, 어린이는 2회 접종이 필요하다. 그런데 당시 바이러스 확산세가 예상만큼 크지 않아 실제 접종 인구는 500만 명에 그쳤다. 정부가 남은 백신을 대량 소각했는데 이 때문에 ‘정부가 보건위험을 과장해 제약사 배만 불려줬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프랑스 정부는 1998년 B형 간염 접종을 추진하던 중에 ‘백신이 다발성경화증을 비롯한 각종 질환을 일으킬 수 있다’며 접종을 돌연 중단하는 일도 있었다. 이런 우려는 나중에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지면서 정부의 신뢰에 다시 금이 갔다.
2010년 유명 제약사 세르비에가 당뇨약 ‘메디아토르’를 체중증가 억제제로 판매해 최대 2000명의 사망자를 낸 사건은 최악의 의료 비리로 꼽힌다. 이 약은 복용자의 심장판막에 이상을 일으켰지만 회사는 이런 부작용을 알면서도 알리지 않았다.
에마뉘엘 마크롱 정권의 코로나19 백신접종 독려 정책도 좀처럼 먹히지 않고 있다. 지난해 12월 코로나19에 감염됐던 마크롱 대통령은 당초 ‘백신 접종을 의무화하지 않겠다. 투명성을 바탕으로 설득하는 전략을 펴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지난달 22일 코로나19 음성 판정을 받았거나 백신 접종 확인서가 있어야만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추진하려다 야당으로부터 ‘보건 독재’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인구대비 백신 접종 속도가 가장 빠른 나라는 이스라엘이다. 지난해 12월 20일 접종을 시작한 이스라엘은 같은 달 29일까지 인구 860만 명 중 약 64만 명이 접종을 받았다. 100명당 7.44회 접종으로 각각 지난해 12월 8일과 14일부터 먼저 접종을 시작한 영국(1.18회), 미국(0.78회)보다 훨씬 높다. 충분한 백신 물량 확보와 체계적 준비, 안전성에 관한 집중적 홍보 덕이라고 영국 텔레그래프는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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