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사정없이 쪼그라들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위세 말입니다. 트위터라는 스피커가 꺼지는 순간 그의 영향력은 사라졌습니다. 지난 4년 동안 880만 명의 팔로어들에게 왜곡된 주장과 정적들에 대한 비난을 쏟아내는 것이 주요 업무 중 하나였던 트럼프 전 대통령은 트위터의 계정 차단과 함께 한순간에 대중의 관심 영역에서 완전히 잊혀진 사람이 된 것이죠. 계정이 막혀버리자 일주일 넘게 백악관에서 혼자 끙끙 고민하던 그는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 날 도망가는 사람처럼 아침 일찍 플로리다로 떠나버렸습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초라한 퇴장 드라마는 소셜미디어의 막강한 영향력을 새삼 절감하게 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대다수 미국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트럼프 소음’을 더 이상 안 듣게 돼서 좋다”는 것이죠. 하지만 미국인들의 속마음도 편치만은 않습니다. 트위터의 이번 결정은 헌법에 보장된 개인의 의사표현 권리를 막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미국처럼 수정헌법 1조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금쪽같이 여기고, 검열을 악으로 보는 나라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인권단체인 시민자유연대(ACLU)는 평소 트럼프 전 대통령을 비판해온 진보 성향 단체입니다만 트럼프 계정 차단에 대해 “헌법 수호 측면에서 나쁜 선례를 남길 수 있는 옳지 않은 결정”이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트위터가 이런 후폭풍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요. 이 또한 한 편의 드라마입니다. 미 언론과 관련 블로그 등을 종합해보면 드라마의 배경은 의회 난입 사태가 발생한 워싱턴도, 트위터 본사가 있는 샌프란시스코도 아닙니다. 주 무대는 남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당시 막후 상황을 아는 전문가들에 따르면 트위터를 이끄는 잭 도시 최고경영자(CEO)는 이곳에서 휴가를 즐기던 중 대통령 계정 차단이라는 ‘세기의 결정’을 내렸습니다. 폴리네시아는 남태평양의 섬들로 구성된 프랑스 해외령으로 이 섬들 중 하나인 타히티에서 폴 고갱이 그린 원주민 여성 그림은 매우 유명하죠. 요즘은 미국과 유럽의 부호(富豪)들이 자국의 엄격한 신종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방역규칙을 피해 몰려가는 곳이기도 합니다.
트위터가 단칼에 영구 차단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닙니다. 의회 난입 사태 직후 트위터는 1차로 계정을 정지합니다. 이 결정은 도시 CEO의 자발적인 결정이라기보다는 ‘트위터 3인방’으로 불리는 30대 후반~40대 초반의 고위급 경영진 3인의 건의를 받아들인 것이었죠. 폴리네시아에서 휴가를 즐기던 도시 CEO에게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오른팔’ 격인 비자야 가디 법률정책 고문(여성)으로부터 긴급 전화가 걸려옵니다. 의회 폭력 사태로 난리가 난 것을 본 그녀는 신속하게 트럼프 계정 차단의 필요성을 건의합니다. 도시 CEO는 마지못해 “당신에게 일임하겠다”는 식으로 답변을 줍니다. ‘미적지근한 동의’였죠. 1차 계정 차단 작업 완료.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영구 차단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트위터는 후속 작업에 돌입합니다. ‘소셜미디어 커뮤니티 스크리닝(검토)’ 작업이죠. 대개 소셜미디어 플랫폼들은 계정 통제 결정을 내린 뒤 자사 트래픽뿐 아니라 타사 소셜미디어의 토론 흐름도 검토합니다. 특히 이번 경우 트위터는 팔러 등 극우 성향의 소셜미디어 트래픽을 집중 검토했습니다. 의회 난입 사태로 한바탕 난리를 치른 후 트럼프 지지자들의 주장이 점점 더 과격화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띄었죠. 의견들 중에는 “폭력적 방법을 동원해 조 바이든 취임을 막아야 한다”는 등 위해(危害) 시도를 암시하는 내용들도 많았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트위터 내부적으로 직원들의 집단 성명 움직임도 불붙었습니다. “트위터의 소극적 대응”을 비판하는 여론을 직접 피부로 겪는 직원들이 서명 운동에 돌입한 것이죠. 트위터 직원 4900명 중 400여명이 ‘트럼프 계정을 영구 차단시켜야 한다’고 서명하면서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습니다. 내부 의견 청취 시스템이 잘 갖춰진 미국 회사 입장에서는 직원들의 집단 의견을 무시해버릴 수는 없는 상황이었죠. 여기에 경쟁자 페이스북이 ‘트럼프 임기 말까지 계정 차단’이라는 결정을 내리며 발 빠른 대응을 하는 모습을 보이자 트위터는 속이 타들어 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2시간 후 1차 계정 차단이 해제되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다시 트위터 무대로 돌아왔습니다. 트위터로서는 “이제 좀 조용해지면 좋으련만”하고 희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계정이 풀리자마자 “미국 애국자들의 위대한 목소리(GIANT VOICE)를 들리게 해야 한다”는 특유의 대문자 트윗을 날리며 더욱 선동적인 면모를 보입니다. 이어 “바이든 취임식을 보이코트하겠다”며 지지자들에게 ‘나를 따르라’식의 진두지휘 명령을 내리죠.
소셜미디어 토론장, 내부 분위기,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3각 위험 신호를 감지한 ‘트위터 3인방’에게 폴리네시아의 도시 CEO로부터 긴급 전화가 걸려옵니다. 3인방은 그가 어떤 최종 결정을 내릴지 이미 예감한 상태. 도시 CEO의 첫 마디는 “나는 선을 그었다. 지금 상황은 그 선을 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선(line)은 ‘대중의 이익이 개인의 표현의 자유보다 앞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겠죠. 도시 CEO도 법적, 영업적, 윤리적 심사숙고 끝에 이런 결정을 내렸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습니다.
이후 트위터는 트럼프 대통령과 ‘두더지 잡기(Whack-a-Mole)’ 싸움에 돌입합니다. 우리나라 오락실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뽕망치 게임을 영어로 이렇게 부르는데요. 트럼프 대통령은 평소 이용하던 @realDonaldTrump 계정이 막히자 @POTUS 등 자신의 영향력이 닿는 다른 계정으로 빠르게 옮겨가며 지지자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전달하려 했고, 트위터는 이를 간발의 차이로 추적하며 차단시켜 버렸죠. 트럼프 대통령과 트위터 간에 펼쳐졌던 ‘계정 때려 막기’ 게임을 이렇게 부릅니다. ‘Whack-a-Mole’은 요즘 미국의 화제어이기도 하죠.
트럼프 전 대통령이 트위터에서 1차 계정 정지 후 영구 퇴출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36시간. 그동안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 샌프란시스코에서, 워싱턴에서 많은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졌습니다. 트럼프의 운명을 결정지은 시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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