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베개 베고 주무십니까. 이불에 밀려 별로 주목받지 못하지만 숙면을 취하는 데 베개만큼 중요한 게 없죠. 요즘 미국인들은 베개 얘기를 많이 합니다. ‘마이필로우(My Pillow·내 베개)’라는 회사 때문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 회사의 마이크 린델 대표(60) 때문이죠. 분당 12개씩, 하루에 3만7000개를 생산하는 ‘베개 왕국’ 사장님 린델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열렬 지지자로 유명합니다. 한때 ‘트럼프 친구’를 내세우며 승승장구했지만 요즘 총체적 난국에 빠져있습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의회 난입 사태 후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친구도 없이 은둔할 때 유일한 방문객이 린델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방문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로버트 오브라이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팻 치폴론 법률고문이 문 앞에서 쫓아버렸다고 하죠.
문전박대 신세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트위터는 “반란 선동의 위험이 있다”며 47만4000명의 팔로어를 가진 린델의 계정을 영구 차단했습니다. 선거기기 제작회사인 도미니언 보팅시스템즈는 “선거조작 주장을 철회하고 사과하지 않으면 법적 행동에 돌입하겠다”는 경고장을 발부했습니다. 베드배스앤드비욘드(BB&B), 콜스 등 온-오프라인 소매 체인과 홈쇼핑 채널 등은 “더 이상 마이필로우 제품을 판매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변변한 경제계 거물 지지자가 없는 트럼프 전 대통령은 그동안 린델을 얼굴 마담으로 내세워 정책 홍보에 이용했습니다. 백악관이 주최하는 기업가 라운드테이블 미팅에서 트럼프의 옆자리는 언제나 그의 차지였죠. 전혀 관련이 없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태스크포스 회의에도 참석했습니다. 지난해 백악관에서 열린 코로나19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이 나에게 치료제를 찾도록 부탁했다”고 밝혔다가 기자들로부터 “그런데 의료면허는 있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습니다.
린델은 2016년 트럼프 유세 때 처음 알게 된 뒤 “그를 만난 건 하늘의 섭리”라며 “그와 함께 끝까지 가겠다”고 밝혀왔습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과 ‘종교’ ‘기업가’ 키워드가 통했던 것이죠. 그는 트럼프 최측근인 루디 줄리아니 변호사조차 포기한 부정선거 주장에 아직도 매달리고 있습니다. 그냥 “선거를 도둑맞았다”는 주장 정도가 아닙니다. 자신만의 구체적인 논리도 가지고 있죠. “도미니언보팅시스템즈가 사전에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 측과 공모해 전산 소프트웨어 조작을 통해 수천만 표를 바이든 측에 몰아줬다”는 겁니다.
최근 극우 성향의 인터넷방송 뉴스맥스에 화상 출연해 또 한 번 선거조작 주장을 펴다가 ‘위험 신호’를 감지한 프로그램 앵커와 싸움이 붙어 앵커가 돌연 퇴장하는 방송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극우방송 앵커까지 박차고 나갈 정도의 그의 황당한 주장은 일명 ‘린델 폭발 사건’으로 불리며 미국 소셜미디어에서 인기몰이 중인 동영상입니다.
여기에 건실한 종교인 이미지로 밀고 나가는 린델이 할리우드 여배우 제인 크라코스키에게 선물 공세를 펼치며 연인 관계였다는 스캔들 보도까지 나왔습니다. 그러자 크라코스키는 “‘커밋’(미국의 인기 개구리 인형 캐릭터)과 스캔들이 났으면 났지 린델은 절대 사절”이라며 극구 부인하고 나섰죠.
이쯤 되면 린델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네소타 교외에서 술집을 경영했던 그는 종교의 힘으로 오랜 마약 중독에서 벗어났고, ‘베개 신화’를 이룩했다는 자수성가 스토리를 강연 때마다 설파하고 있습니다.
코카인 중독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그는 어느 날 섬광 같이 “내 불면증은 베개 탓”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2004년 마이필로우를 설립했습니다. 대형 회사들이 장악한 베개 시장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던 그는 2011년 한밤중 TV에서 방송되는 30분짜리 인포머셜 광고가 대박을 터뜨리면서 성공한 기업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죠. 직접 베개를 들고 “신개념 메모리폼”이니 “혁신적인 바느질 공법”이니 하면서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광고 덕분에 ‘인포머셜 킹’으로 불리죠. 베개 1개당 45달러(5만원)라는 비교적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전체 인포머셜 시장에서 5위권 안에 드는 뛰어난 판매 실적을 올리고 있습니다. 월마트 등 일반 소매체인으로 유통망을 확대하면서 지금까지 3000만개 이상의 베개를 팔아치웠습니다.
경제전문지 포브스에 따르면 린델의 재산은 3억 달러(3370억 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물론 1800억 달러(202조 원)의 재산을 가진 세계 최고 부자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창업자에 비하면 새 발의 피지만 베개 하나로 뒤늦게 시장에 진입한 창업가로서는 괄목할만한 실적이죠.
하지만 마약 중독도 끊고 피땀 흘려 일군 베개 왕국은 한 번 발을 들여놓은 정치 세계에서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빠지면서 와르르 무너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래도 린델은 “트럼프 지지 활동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러는 사이 베개 사업은 조롱 대상이 돼 진보운동가들을 중심으로 ‘마이필로우 타도’ 투자 모집 공고들이 인터넷에서 나돌고 있죠. 이러다가 어느 날 ‘눈물의 폐업정리 세일’ 인포머셜에 나오는 건 아닌지 지켜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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