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가 됐다” 트럼프 첫 대권 도전 발판 됐던 CPAC [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3월 3일 14시 01분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차기 대선 출마 가능성을 시사한 ‘CPAC(보수주의정치행동회의·씨팩)’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퇴임 후 39일 만에 첫 공개연설 무대로 CPAC을 골랐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 발언의 파급력이 보장된다는 확신이 섰기 때문이겠죠.

올해 48년의 역사를 가진 CPAC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2016년 대선 출마를 결심한 계기가 됐을 정도로 친한 사이입니다. 하지만 지나친 밀착 관계 때문에 논란도 많습니다. 특히 올해 CPAC은 “트럼프 대잔치”라는 혹평이 나오고 있습니다. 주최자도 아닌 초대 연설자일 뿐인 트럼프를 위해 행사의 성격이 좌지우지될 지경이라는 것이죠.

올해 CPAC 행사의 인기 마스코트로 등장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조각상. 옆에서 포즈를 취하는 것이 행사 참가자들에게 필수 코스가 됐다.(애틀랜타 저널 컨스티튜션)
올해 CPAC 행사의 인기 마스코트로 등장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조각상. 옆에서 포즈를 취하는 것이 행사 참가자들에게 필수 코스가 됐다.(애틀랜타 저널 컨스티튜션)

CPAC은 미국의 대표 논객인 고(故) 윌리엄 버클리 내셔널리뷰 발행인 등 몇몇 보수운동가들이 결성한 전미보수연합(ACU)이라는 단체가 1973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컨퍼런스 행사입니다. ‘미국 최대의 보수정치 행사’로 알려졌죠. 2010년대 초반 CPAC은 대형 행사로 성장하는데요, 연설자로 등장해 CPAC 지명도를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트럼프 전 대통령입니다.

당시 기업가로 TV 리얼리티쇼 진행자였던 트럼프는 ‘화려한 입심’이 보장된 인물이었죠. 트위터를 통해 자신의 보수적 성향을 간간이 내보이던 그에게 CPAC 측은 2010년 처음으로 연사 초대장을 보냅니다. 일반 정치인이 아닌 ‘미디어 퍼스낼리티(미디어 친화적 인물)’가 연단에 서자 청중들은 열광했죠. ACU의 오랜 수장(首長)인 매트 슐랩 회장은 트럼프가 대통령감이라고 직감하고 대선 출마를 권유합니다. 하지만 트럼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TV 진행자 역할에 재미가 들려있던 때였고, 미디어의 명성을 이용한 ‘트럼프왕국’ 건설이 급선무였기 때문입니다.

2010년 트럼프 전 대통령이 처음 CPAC 연단에 선 모습. (폴리티코)
2010년 트럼프 전 대통령이 처음 CPAC 연단에 선 모습. (폴리티코)

2010년 이후 트럼프는 매년 CPAC 연단에 오르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된 후 아무리 바빠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CPAC에 등장했습니다. 퇴임 후인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2015년 CPAC 연설은 유명합니다. 그는 이 때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출생지가 미국이 아니기 때문에 피선거권이 없다는 주장을 내놓습니다. 일명 ‘버서(Birther)’ 운동의 시작이지요. 당시만 해도 일부 강경 보수파들 사이에 오가던 주장이었지만 이를 전국적인 무대에서 공개적으로 밝혔다는 점에서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옵니다. 10차례 이상 기립 박수를 받을 정도로 행사장을 열광의 도가니로 만든 그에게 슐랩 회장은 “이제 당신은 충분히 표를 모을 수 있다”면서 출마를 재차 권유합니다. “때가 됐다”고 판단한 트럼프는 2015년 CPAC 폐막 직후 대권 도전을 공식 발표하죠.

트럼프 전 대통령은 CPAC을 통해 정계 거물도 성장했을 뿐 아니라 CPAC의 성격도 바꿔놓습니다. CPAC은 1960년대 급팽창했던 진보주의에 대한 반발로 태동했습니다. 1960년대 내내 지속됐던 민주당 집권 시대를 마감하고 집권한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이 1974년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불명예 퇴임하면서 혼돈에 빠진 보수층은 개인의 자유, 작은 정부, 가독교적 가치 등 건국이념을 널리 알리자는 차원에서 CPAC을 조직했습니다. 1985년 로널드 레이건 당시 대통령이 개막 연설을 하면서 크게 한번 주목을 받았지만 일반 미국인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의 유명세는 얻지 못했습니다.

1985년 로널드 레이건 당시 대통령이 CPAC 행사에 초대됐을 때 모습. (잡지 롤링스톤즈)
1985년 로널드 레이건 당시 대통령이 CPAC 행사에 초대됐을 때 모습. (잡지 롤링스톤즈)

CPAC이 초기에 고전을 면치 못한 것은 학술 행사 성격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CPAC은 전통적으로 워싱턴에서 매년 2월에 3박4일 정도 일정으로 개최됩니다. 워싱턴 특파원 시절 현장 취재 경험에 따르면 이때에 맞춰 전국에서 보수 지지자들이 워싱턴을 방문합니다. CPAC이 열리는 호텔의 작은 룸마다 수십 개 컨퍼런스가 동시다발적으로 열립니다. 교수나 싱크탱크 연구원들이 진행하는 컨퍼런스를 듣고 서로 의견을 교환하는 미국식 네트워킹 문화에 익숙해야만 CPAC의 의미를 알 수 있죠.

CPAC은 오랫동안 ‘백인 남성 아저씨들만 가는 고리타분한 학술 행사’라는 평을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주최 측은 2010년대부터 컨퍼런스보다 유명 정치인들을 호텔 대강당으로 초청해 진행하는 연설 무대에 주력하게 됩니다. 바로 이게 미디어가 주목하는 ‘이벤트’였기 때문이죠. 점차 언론의 화젯거리가 되면서 이제 CPAC 연설을 한다는 것은 정치인에게 큰 경력이 되고, 요즘 뜨는 정치인이 누구인지 알려면 연사들을 확인해보면 됩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CPAC의 이런 변화의 흐름을 잘 탄 동시에 흐름을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CPAC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된 것이죠. CPAC은 트럼프 전 대통령 때문에 올해 행사 장소를 바꿀 정도입니다. 사상 처음으로 워싱턴이 아닌 플로리다 올랜도의 하얏트 리젠시 호텔에서 열렸습니다. 주최 측은 “플로리다가 신종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방역수칙이 비교적 느슨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지만 진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플로리다는 퇴임 후 트럼프의 본거지죠.

올해 CPAC의 주제는 ‘취소되지 않은 미국.’ 온라인상에서 벌어지는 ‘캔슬 컬처(취소 문화)’를 빗댄 것이다. (CPAC 홈페이지)
올해 CPAC의 주제는 ‘취소되지 않은 미국.’ 온라인상에서 벌어지는 ‘캔슬 컬처(취소 문화)’를 빗댄 것이다. (CPAC 홈페이지)

자유분방한 플로리다를 개최지로 정했기 때문일까요. 올해 CPAC 주제도 젊은 감각으로 변했습니다. 이번 주제는 ‘취소되지 않은 미국(America Uncanceled).’ 지난해 ‘미국 대 사회주의,’ 2019년 ‘중국의 부상: 미국 어떻게 할 것인가’와 비교할 때 분위기부터 확 다릅니다. 요즘 화제가 되는 ‘취소 문화(혐오나 차별적 행동을 한 유명인들을 온라인에서 삭제하는 일종의 보이콧 운동)’를 빗댄 것이죠. 모처럼 재미있는 주제여서 개막 전 기대를 모으기도 했지만 역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선 부정선거 주장의 재탕이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취소 문화’가 주제가 된 것은 트럼프 계정을 삭제한 트위터, 페이스북 등 IT(정보기술) 기업들을 도마에 올리기 위한 것이었죠.

초대 연사 목록도 트럼프 충성파 위주로 짜여졌습니다. 다들 연사 초대장을 기다렸겠지만 트럼프 전 대통령과 갈등 관계에 있는 공화당 정치인들은 초대장을 받지 못했습니다. 미치 매코널 상원 원내대표, 밋 롬니 상원의원 등은 초대받지 못한 손님들입니다.

올해 CPAC을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로 ‘아이돌(우상)’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뉴욕타임스는 “정치판 ‘아메리칸 아이돌(TV 오디션 프로그램)’”이라고 혹평합니다. 인터넷매체 데일리비스트는 “단 한 명의 아이돌을 위한 특별행사”라고 조롱합니다. CPAC을 통해 트럼프 전 대통령을 우상처럼 숭배하는 분위기가 절정에 달했다는 것이죠. 독재 국가에서나 볼법한 개인 우상화라는 단어가 미국 정치 한복판에서도 등장하고 있는 것이죠.

정미경 기자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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