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규율된 민병대는 자유를 지닌 주(州)의 안보에 필수적이므로 무기를 소지하고 휴대하는 국민의 권리는 침해받을 수 없다.”
미국 수정헌법 2조의 내용이다. ‘표현의 자유’를 규정한 수정헌법 1조 바로 다음에 총기 보유권을 언급하고 있을 정도로 미국은 오래전부터 총기 보유의 중요성을 인정해 왔다. 서부 개척을 통해 광대한 국토를 보유하게 된 역사, 각각 개별 국가나 다름없는 50개 주가 모인 연방정부 체계 등도 헌법에 총기 보유권이 등장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대량 살상을 가능하게 하는 초현대식 무기가 속속 등장하고 잇따른 총기 난사로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하면서 “더 이상 규제를 미룰 수 없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지난달 16일 아시아계 6명 등 총 8명이 숨진 남동부 조지아주 애틀랜타 연쇄 총격, 같은 달 22일 10명이 숨진 콜로라도주 볼더 식료품점 사태 후 규제를 촉구하는 의견이 거세다. 문제는 대형 총기 사건이 나거나 선거가 있을 때마다 총기 규제가 단골 의제로 등장하지만 실질적인 해법이 나온 적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8일(현지 시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소비자가 부품을 사들여 직접 제작하는 소위 ‘유령총(ghost gun)’ 단속, 군사 무기와 대형 탄약클립의 사적 소지 금지, 총기 제조사 면책 폐지, 위험인물의 총기 소지 금지 등을 골자로 한 행정명령을 발표했다. 하지만 행정명령 발표 불과 몇 시간 후에 남부 텍사스주에서 또 총격 사건이 일어나 1명이 숨지고 5명이 다쳤다. 이번 행정명령 또한 바이든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 주장했던 온라인 총기 판매 금지, 고성능 총기 판매 금지 등에 비해 규제 강도가 낮아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높다. 미국은 왜 고질적인 총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까.
○ 전 세계 총기의 40%가 미국서 유통
미국에는 전 세계 총기의 40%인 4억 정이 있다. 미 인구(3억3000만 명)보다 많은 수치다. 당국에 등록되지 않은 총기까지 합하면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은 수가 유통되고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미국이 21세 미만의 음주를 금하면서도 18세 이상의 총기 구매를 허용하는 것 또한 총기에 대한 쉬운 접근을 가능케 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후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진 미국인들이 신변 안전을 위해 총기를 대거 구매한 것도 총기 범람에 영향을 미쳤다. 독립 연구기관 스몰암스애널리틱스&포어캐스팅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의 총기 판매량은 2280만 정으로 2019년(1390만 정)을 훌쩍 뛰어넘었다. 지난해 생애 최초로 총기를 소지한 사람도 840만 명에 달했다. 총기 판매 급증으로 미 전역에서 탄약 부족이 두드러졌다는 보도가 잇따랐다.
총이 넘쳐나니 총기 범죄 사망자 또한 당연히 많다. 미 워싱턴대 보건계량분석연구소(IHME)가 세계 각국의 10만 명당 총기 범죄 사망자 비율을 분석한 결과 미국은 4.12명으로 한국 일본(이상 0.02명), 캐나다(0.50명), 러시아(0.72명)보다 훨씬 높았다. 치안이 불안하고 양극화가 심한 중남미 엘살바도르(35.50명), 베네수엘라(32.75명), 온두라스(21.22명) 등을 제외하면 주요국 중 가장 높은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1975년 이후 현재까지 총격으로 숨진 미국인은 150만 명 이상이다. 1776년 건국 후 미국이 벌인 모든 전쟁에서 숨진 사망자(140만 명)를 뛰어넘는다.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2018년 한 해 총기 사망자는 3만8390명이다. 매일 105명이 총격으로 숨진 셈이다.
총기 관련 사건 사고 중 자살, 우발적 사고 등과 달리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는 것은 단연 ‘총기 난사(mass shooting)’다. 대표적인 예가 1999년 4월 콜로라도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10대 백인 남학생 두 명이 이유 없이 900여 발을 난사해 동료 학생 12명, 교사 1명이 숨졌고 이들 스스로도 목숨을 끊었다. 이 사건은 미 전체에 엄청난 상흔을 남겼고 아직도 학내 총기 사건의 대표 사례로 꼽히고 있다. 2007년 한국계 학생 조승희가 버지니아공대에서 32명을 죽인 사건, 2012년 코네티컷주 샌디훅 초등학교에서 젊은 남성이 학생과 교사 26명을 사살한 사건 등도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됐다.
○ ‘총기 소지=자유’ 인식 강해
미국에서는 총을 자기방어의 수단 겸 자유주의의 상징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있다. 2017년 여론조사 회사 퓨리서치센터 조사에 따르면 미 총기 소유자의 3분의 2가 “자기방어를 위해 총을 구매했다”고 밝혔다. 무기가 없는 무방비 상태가 본인과 가족들에게 더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총기 난사로 인한 희생자가 많아질수록 자위권 행사를 위해 총기를 보유하려는 사람 또한 많아진다는 의미다.
정부 권력에 대한 견제 심리가 강한 점도 자위권 주장에 영향을 미쳤다. 외교안보 매체 내셔널인터레스트는 4일 “지난 수십 년 동안 정부와 자국민 사이의 상호 신뢰가 감소할수록 무기 소유 비율은 높아졌다. 시민들은 총기 소유 권리를 보장받음으로써 정부가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려는 시도를 막을 수 있다고 본다”고 해석했다. 자유주의가 지배 이념으로 자리 잡은 미국에서 헌법이 명시한 권리를 제한하는 것은 개인 자유 침해, 헌법 훼손으로 여겨진다는 의미다.
사냥문화도 빼놓을 수 없다. 시장조사 회사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2019년 미국의 사냥 인구는 1500만 명이 넘는다. 갤럽 조사에 따르면 총기 소지자 중 63%가 ‘자기 보호’를, 40%가 ‘사냥’을 그 이유로 꼽았다(복수 응답). 총기를 소유한 가정에서 성장한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총에 노출된다. 특히 최근에는 사냥에도 군사용 살상 무기인 AR-15, AK-47 등 반자동 소총을 쓰는 사람들이 많아져 우려를 낳고 있다.
○ 전미총기협회(NRA)의 막강한 영향력
총기 규제를 반대하는 세력의 중심에 이익단체 전미총기협회(NRA)가 있다. 남북전쟁 당시 활약했던 북군 장교들이 1871년 설립했고 현재 500만 명의 회원을 보유한 막강한 이익단체로 군림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로널드 레이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등 공화당 출신 대통령은 물론이고 민주당의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조차 회원이었다.
워싱턴 인근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에 본사를 둔 NRA의 정치적 영향력은 막강하다는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이 단체는 선거철이 되면 주요 후보자를 총기 소지권 옹호 정도에 따라 ‘A’부터 ‘F’까지 6단계로 등급을 매긴다. 총기 보유를 강하게 반대하는 F등급 후보들에 대해서는 대대적인 낙선운동을 벌인다. 각종 총기 규제 법안이 번번이 의회 문턱을 넘지 못하는 이유 또한 많은 정치인이 NRA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심지어 공화당 내에서도 NRA 지지를 얻으려는 후보 간 경쟁이 치열하다. 2014년 중간선거 당시 7선 하원의원으로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였던 워싱턴 정계의 실력자 에릭 캔터 의원은 버지니아주 당내 경선에서 NRA, 티파티 등 보수 단체가 지원하는 무명의 데이비드 브랫 후보에게 패했다.
지난해 6월 민주당 지지 성향이 강한 뉴욕주 검찰은 전·현직 NRA 지도부가 거액을 횡령했다는 혐의로 NRA 해체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맞서 NRA는 공화당 지지세가 강한 남부 텍사스에서 한국의 법정관리와 유사한 파산보호를 신청한 후 비영리단체로 거듭날 뜻을 밝혔다. 텍사스에는 40만 명이 넘는 NRA 회원이 있다.
○ “규제하면 총기 범죄 더 늘어”vs“방치하면 공멸”
공화당과 민주당은 총기 규제를 둘러싸고 완전히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공화당은 규제를 강화하면 일반인의 총기 접근권이 약화돼 잠재적 범죄자들이 공격할 때 속수무책으로 당한다고 주장한다. 테드 크루즈 공화당 상원의원(텍사스)은 지난달 콜로라도 총격 사건 직후 열린 법사위 청문회에서 “총격이 벌어질 때마다 이 멍청한 위원회를 열어서 무더기 법안을 제안하지만 그중 살인을 멈추게 하는 것은 없다. 민주당의 목적은 살인을 멈추는 게 아니라 합법적으로 총기를 소지한 시민에게서 총을 빼앗으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애틀랜타 연쇄 총격 참사 13일이 흐른 지난달 29일 공화당이 다수당인 조지아주 상원 또한 온라인으로 총기면허를 간편하게 갱신하고, 여행자의 총기 휴대를 허용하는 내용의 총기 규제 완화 법안을 통과시켰다. 주지사가 비상사태를 이유로 총기 제조업체나 사격연습장을 폐쇄할 수 없도록 금지하는 조항도 담겼다.
반면 민주당은 서부 개척시대 때 만들어진 수정헌법 2조를 21세기에도 똑같이 적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으며 총기 구매자의 신원, 정신병력 등을 철저히 점검함으로써 사전에 문제의 소지가 있는 사람이 총기에 접근할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맞선다. 현 상황을 방치하면 모두가 피해를 본다며 강도 높은 대책을 마련할 뜻을 보이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8일 연이은 총격 사건을 개탄하며 “이것은 공중보건 위기이자 유행병(epidemic)이다. 당장 중단되어야 한다”며 “어느 누구도 100발 총이 필요하지 않다”고 질타했다. 그는 콜로라도 식료품 총격 사건 다음 날인 지난달 23일에도 “1시간은커녕 1분도 더 기다릴 수 없다. 생명이 달린 문제”라며 의회에 총기 규제 법안을 조속히 통과시켜 달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그의 바람이 이뤄질지는 알 수 없다. 공화당이 총기 보유가 헌법상 권리라며 규제에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민주당과 공화당은 각각 상원 100석 중 50석을 양분하고 있다. 2018년 플로리다주 고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 2019년 텍사스와 오하이오에서의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총기 규제 법안이 표결에 부쳐졌지만 당시 상원 다수당인 공화당의 반대로 부결됐다.
무조건 규제를 강조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정부가 나를 지켜주는 게 아니라 총이 나를 지켜준다고 여기는 미국인이 적지 않다. 한국에서는 정부 정책에 순응하거나 이해하려는 정서가 있지만 미국인은 이를 간섭과 통제로 여길 때가 많다”고 진단했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 또한 “미국의 한 도시에서 집에 있는 총기를 가져오면 50달러를 주겠다며 총기 회수 프로그램을 실시했는데 사람들이 낡은 총을 가져와서 이 돈을 받은 후 그걸로 새 총을 사는 바람에 유명무실해졌다”며 이런 미국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채 탁상공론식 규제를 하면 또 실패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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