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부터 오스트리아 빈에서 서방과 이란의 핵협상이 재개됐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행정부가 2018년 5월 전임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의 주요 치적으로 꼽히는 ‘핵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를 전격 탈퇴한 지 꼭 3년 만이다.
협상은 순조롭지 않은 상태다. 이란은 “미국이 트럼프 행정부 시절 가했던 제재를 모두 해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조 바이든 행정부는 “이란이 핵합의 조건을 준수할 때 제재를 풀겠다”고 맞선다. 이란의 거부로 미 대표단은 인근 호텔에 머물며 동맹국에 의견을 전달하는 식으로 협상에 간접 참여하고 있다. 이 와중에 11일 이란 중부 나탄즈 핵시설이 이스라엘 소행으로 추정되는 공격을 받자 이란은 “이스라엘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전 세계가 이 합의를 주목하는 이유는 협상 과정을 통해 바이든 미 행정부의 대외정책 방향을 가늠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미국의 이란 핵 해법이 결국 북핵 접근법과도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이란 핵합의 질곡의 역사
2002년 이란 반정부단체 이란국민저항협의회(NCRI)는 “정부가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2곳의 비밀 우라늄 농축 시설을 신고하지 않았다”고 폭로했다. 깜짝 놀란 미국, 유럽연합(EU) 등이 속속 이란 제재에 나섰다. 이 와중에 ‘미국은 악마국가’ ‘이스라엘을 지도에서 지우자’ 등 각종 막말로 유명한 강경 보수파 마무드 아마디네자드(65)가 2005∼2013년 대통령을 지내자 이란과 서방의 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2013년 유화파 하산 로하니 현 대통령(73)이 집권하고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합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오랜 제재로 경제가 피폐해진 이란은 서방의 투자가 절실했고 미국도 중동에서 발을 빼고 싶어 했다. 당시 오바마 미 행정부는 미 외교안보 정책의 오랜 핵심지 중동에서 아시아로 눈을 돌려 급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피벗 투 아시아’ 정책을 내세웠다. 이란 핵위협을 줄여 중동 안정을 추구하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2015년 7월 미국 주도로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 등 5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과 독일(P5+1)이 이란과 핵합의를 체결했다. 이란이 핵무기에 쓸 수 있는 고농축 우라늄 개발을 중단하고 서방의 핵활동 감시를 허용하되 서방 역시 이란에 대한 각종 경제 제재를 해제한다는 내용이다.
합의 6개월 만인 2016년 1월 제재 해제가 이뤄졌다. 국제사회는 1979년 이슬람 혁명 후 사실상 은둔국가로 지냈던 이란에 러브콜을 보냈다. 인구 8300만 명, 매장량 기준 세계 4위 원유 등 풍부한 지하자원, 넓은 국토, 페르시아 제국의 찬란한 문화유산, 높은 과학기술 수준과 교육열을 지닌 이란의 매력이 상당했다. 특히 그간 서방이 동결했던 약 1100억 달러(약 122조 원)의 자금이 풀리면 도로 항만 철도 등 대형 인프라 공사가 줄을 이을 것으로 보고 수주를 노린 각국 지도자가 속속 이란을 방문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제재 해제 6일 만에 주요국 정상 중 가장 먼저 이란을 찾았다. 이탈리아는 이란 대통령으론 17년 만에 유럽을 찾은 로하니 대통령을 환대하기 위해 로마 카피톨리니 박물관 내 알몸 조각상을 가리고 만찬 때 와인도 제외했다. 음주와 알몸에 엄격한 이슬람 율법을 의식한 조치였다.
2017년 집권한 트럼프 당시 미 대통령은 핵합의를 ‘역대 최악의 결정’이라며 비판했다. 특히 합의 내용 중 ‘일몰 조항(sunset clause)’, 즉 일정 기간이 흐른 후 자동으로 폐지되는 부분을 문제 삼았다. 원래 합의에는 ‘2025년부터 이란의 핵 활동 제한을 단계적으로 풀어준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재협상을 통해 일몰 조항 삭제, 합의 위반 시 미국과 EU의 즉시 공동제재 등을 추가하자고 주장했다. 이란이 거부하자 2018년 5월 핵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바이든, 합의 복원 통해 ‘명분’ ‘실리’ 다 잡기
바이든 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트럼프 행정부의 핵합의 파기가 잘못된 결정이었다며 합의 복원을 공언했다. 오바마 정권에서 8년간 부통령을 지낸 바이든 대통령에게 핵합의 복원은 오바마 행정부의 외교 정책을 계승한다는 ‘명분’과 다자외교의 가시적 성과를 보여줄 수 있다는 ‘실리’의 양 측면에서 모두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는 “‘미국이 돌아왔다’는 취임 일성을 내걸고 동맹과 다자주의를 중시하겠다고 거듭 밝힌 바이든 행정부가 합의를 복원시킨다면 특히 핵합의에 참여한 유럽 동맹국에 ‘당신을 중시한다’는 신호를 보낼 수 있다”고 진단했다. 영국 프랑스 독일은 2015년 핵합의 타결 당시에도 이란 경제 개방에 따른 수혜를 기대했다. 복원 후에도 수혜를 볼 가능성이 높아 합의 복원을 강하게 지지하고 있다.
중국 견제 또한 이란 핵합의 복원의 주요 명분이다. 영국 BBC는 “바이든 행정부 또한 오바마, 트럼프 행정부와 마찬가지로 중동의 미 전략자산을 아시아태평양으로 옮기고 싶어 하지만 이란 등 중동 현안이 많아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이란 핵 위험을 줄여야 남중국해 등 중국 압박에 더 많은 자산을 투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6월 18일로 예정된 이란 대선에서 미국에 적대적인 보수 강경파가 정권을 잡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도 바이든 행정부가 서둘러 합의 복원을 추진하는 이유로 꼽힌다. 현지에서는 로하니 대통령이 전임 아마디네자드 대통령과 달리 친서방 정책을 추진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며 실망을 표하는 여론이 높다. 트럼프 행정부의 핵합의 파기 등으로 온건파 입지가 약화된 상태에서 지난해 2월 치러진 총선에서는 전체 290석 중 230석을 강경파가 차지했다.
특히 최근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누적 확진자가 230만 명을 넘을 정도로 로하니 정권이 방역에도 실패했다는 평가가 많아 온건파의 재집권이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란 외환보유액이 2018년 1225억 달러에서 지난해 40억 달러까지 감소하면서 온건파의 입지가 더 약화됐다고 진단했다. 로하니의 후계자로 평가받는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 외교장관(61)은 2월 여론조사에서 불과 5%의 지지만 얻었다. 로하니 대통령은 3연임 제한으로 출마하지 못한다.
문제는 현재까지 협상이 난항을 거듭하고 있다는 데 있다. 무엇보다 양측의 의견 차이가 상당하다. 이란은 핵합의 파기 당시에 존재했던 제재는 물론이고 트럼프 행정부가 추가한 제재까지 일괄 해제해달라고 주장한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란산 원유 수입을 금지했고 이란 중앙은행과의 거래도 제한했다. ‘정부 위의 정부’로 평가받는 혁명수비대 또한 테러단체로 지정했다. 미국이 타국 군대조직을 테러단체로 지정한 것은 처음이다. 이란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와 측근들을 포함한 주요 인사의 해외 금융거래도 사실상 모두 차단했다. 로하니 대통령은 21일에도 “완전한 제재 해제가 이뤄지면 이란은 핵합의 이행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 등 서방은 추가 협상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특히 이란의 탄도미사일 개발 추진, 중동 주요 시아파 무장단체에 대한 이란의 공공연한 지원 등의 문제도 다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란의 지원을 받는 레바논 헤즈볼라, 예멘 후티, 이라크 내 시아파 민병대 등이 중동 불안을 고조시키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중동의 대표적 친미 국가인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가 핵합의 복원에 반발하고 있다는 점도 미국의 고민이다. 이들은 트럼프 전 행정부와 마찬가지로 ‘일몰 조항’을 우려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합의 복원으로 국제사회에서 이란의 영향력이 강화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은 이란이 핵합의 복원 여부와 상관없이 비밀리에 핵무장을 할 것이며 일몰 조항까지 없으면 이란 핵 개발을 제재할 수단이 전무하다며 반발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합의 복원이 이뤄져도 독자적으로 이란 핵 개발을 저지할 것”이란 뜻을 거듭 밝혔다.
○교착 상태 빠진 북핵 협상
이란 핵합의가 복귀 수순을 밟으면 미국의 시선 또한 북핵 문제로 옮겨갈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 행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대북정책 방향 검토를 마무리하고 공개하겠다”고 밝혔지만 석 달이 지난 지금까지 구체적인 윤곽이 나오지 않고 있다. 이란 핵합의 복원 일정 및 내용이 북핵 협상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취임 전부터 북핵 문제 해결에 이란식 방법론을 적용할 뜻을 밝혔다. 그는 싱가포르 1차 북-미 정상회담 전날인 2018년 6월 11일 뉴욕타임스(NYT) 기고문에서 “북한과의 핵협상에서 최선의 모델은 이란”이라고 주장했다. 양국 정상이 결정하는 ‘톱다운’ 해결을 추진하던 트럼프 행정부와 달리 국제 공조에 따른 핵활동 점검, 상세한 로드맵에 따라 북한과 포괄적 협상을 할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취임 후에도 이 같은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외교안보 전문가들은 북핵 협상이 이란 핵합의 복원보다 훨씬 난도가 높은 과제라고 보고 있다. 우선 북한의 핵 역량이 이란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다. 미 국가전략연구소(INSS)는 지난해 11월 현재 북한이 보유한 핵탄두가 최대 60개일 것으로 추정했다. 이란은 핵탄두가 없으며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고농축 우라늄 제조 부문에서만 뛰어난 역량을 가지고 있다. 공공연하게 핵무장이 국가 정책이라고 주장하는 북한과 달리 이란은 겉으로는 핵무기 개발을 부인하고 있다.
경제구조의 차이도 크다. 오바마 행정부가 서구 주요국과 함께 이란 핵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이란 경제에서 차지하는 원유 수출 비중이 높다는 점이 컸다. 서방의 제재가 본격화하기 이전인 2010년 기준 이란 수출에서 원유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약 80%였다. 북한은 오래전부터 고립 경제를 표방해왔고 해외로 수출할 물품이나 천연자원도 거의 없다. 특히 바이든 행정부 출범 후 이전 행정부보다 미국과 더 격렬하게 부딪치는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 제재에 동참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미국이 추가 제재에 나선다고 해도 효과가 미지수다. 미국이 압박하면 북한에 중국과 더 밀착할 빌미만 줄 수 있다는 의미다.
세습 통치가 정착된 북한과 달리 이란은 4년마다 대선을 통해 정권 교체가 이뤄진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인남식 교수는 “오바마 행정부 시절 이란 핵합의가 가능했던 건 로하니 대통령이라는 온건파 지도자의 등장 때문”이라며 “미국이 압박하면 그 기류가 이란 국민에게 전달되고 최고지도자 또한 부담을 느끼는 구조지만 북한은 다르다”고 진단했다. 이란의 핵보유 목적이 국가위신 제고, 영향력 확산에 가깝다면 북한은 생존과 국가안보 측면에서 핵문제에 접근하고 있어 해결 방안 또한 더욱 까다롭고 복잡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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