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류망 위협한 수에즈 사태… 각국 주판알 튕기며 우회로 경쟁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4월 29일 03시 00분


[글로벌 현장을 가다]


임현석 카이로 특파원
임현석 카이로 특파원
《25일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 동쪽으로 130km 떨어진 이스마일리아를 찾았다. 지난달 23일 수에즈운하 남쪽 입구에서 좌초해 운하는 물론이고 전 세계 물류에 엄청난 타격을 입힌 초대형 컨테이너선 에버기븐호의 사고 원인 조사 등 후속 업무를 관장하는 도시다.》

에버기븐호가 억류된 운하 내 그레이트비터 호수 선착장은 출입제한 지역이었다. 군인들이 삼엄하게 통제했고 곳곳에 사진 촬영을 금한다는 표시가 붙었다. 인근 호텔에 묵으려 하자 취재용 카메라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숙박을 거부했다. 이스마일리아 도심에서 만난 아흐마드 함자 씨(29)는 “이번 사건이 이집트 명예를 실추시켰다. 누구도 해외 언론의 보도를 원하지 않는다”며 경계 섞인 눈초리를 드러냈다.

북극해항로 띄우는 러시아

이집트가 이번 사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가 있다. 수에즈운하로 지난해 56억 달러(약 6조2200억 원)의 통행료 수입을 올렸다. 지난해 명목 국내총생산(GDP) 3618억 달러의 약 2%다. 국가 경제의 근간인 운하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 만천하에 드러난 데다 중국, 러시아, 이란, 이스라엘, 아랍에미리트(UAE) 등이 이번 사태를 자국이 관할하는 대체 무역로를 홍보할 기회로 여기는 것 또한 못마땅하다.

특히 중국과 러시아가 적극적이다. 알아흐람 등 현지 언론은 패권 성향을 드러낸 강대국들이 자국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이집트의 불행인 수에즈운하 좌초 사고를 이용하고 있다며 경계하는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타스통신 등에 따르면 유리 트루트네프 러시아 부총리는 에버기븐호 부양에 성공한 지 이틀 후인 지난달 31일 “교통부, 극동개발부 등 관계 부처에 북극해항로(NSR·Northern Sea Route)의 경제성 조사를 지시했다”고 밝혔다. 북극해항로가 수에즈운하를 능가하는 경쟁력을 갖추려면 어떤 조치가 필요한지에 관해 연구하라는 취지다. 미 워싱턴포스트(WP)는 수에즈운하 사고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정권의 인프라 확충 계획에 탄력이 붙었다고 평했다.

북극해항로는 서유럽, 러시아, 중국을 잇는 1만4816km의 무역로로 이 중 약 50%가 러시아 인근 해안선을 지난다. 카라해, 북극해, 시베리아해 등이다. 최대 장점은 동북아와 유럽의 해상운송 거리가 수에즈운하 이용 때보다 훨씬 짧다는 것이다. 북극해항로를 이용하면 독일과 일본의 교역 거리가 1만600km다. 수에즈운하(1만8300km) 때보다 무려 7600km 단축된다.

다만 북극 결빙으로 1년에 5, 6개월만 운영이 가능하고 여름철에도 쇄빙선을 사용해야만 한다. 수에즈운하보다 거리가 짧지만 비용은 최대 3배 비싼 이유다. 지난해 북극해항로를 통과한 물류량 역시 3000만 t으로 수에즈운하(12억 t)보다 훨씬 적다. 러시아는 2030년쯤이면 지구온난화로 북극해항로가 상시 열릴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때까지 연 물류량도 1억 t으로 늘리겠다는 뜻을 밝혔다.

육해상 무역로 패권 쥐려는 中

중국의 우회로 패권 야심 또한 상당하다. 관영 영자지 글로벌타임스는 5일 “수에즈운하 사고 후 세계 공급망이 전례 없는 도전을 맞이했다”며 21세기 육해상 실크로드로 꼽히는 중국의 경제영토 확장사업 ‘일대일로(一帶一路)’를 적극 부각시켰다. 특히 중국 철도의 우수함을 집중 보도했다. 저장성의 대형 화물사는 수에즈운하 사태 후 중국에서 독일 함부르크로 보내는 긴급 화물운송을 사고 전보다 약 35% 늘렸다. 화물선은 정시 도착시간을 준수하는 사례가 40∼60%에 불과하지만 화물열차는 80%에 달한다고 강조했다. 저장성 이우에서 스페인 마드리드까지 연결할 수 있는 1만3052km의 중국∼유럽 화물철도를 홍보하려는 속내가 담긴 것으로 풀이된다.

중국은 해상 무역로 개발을 위해 러시아와의 협력도 강화하고 있다. 북극해를 일대일로와 연결하기 위한 ‘북극 실크로드’ 연구가 대표적이다. 러시아 역시 중국 자본이 필요해 양측의 협력 여지가 많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야심 드러내는 중동 이웃국가들

이란, 이스라엘, UAE 등 중동 각국도 무역로 경쟁에 뛰어들었다. 지난달 28일 카젬 잘랄리 주러시아 이란대사는 자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남북국제운송회랑(INSTC)이 수에즈운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남북국제운송회랑은 인도 뭄바이에서 이란과 중앙아시아를 거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의 7200km를 연결하는 사업이다. 이란, 러시아, 인도 등 3개국은 2000년 협약을 맺고 수로와 철도를 모두 활용하는 복합 운송로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사이 이란이 핵개발 의혹으로 미국과 유럽연합(EU)의 오랜 제재를 받고, 이란에 적대적인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행정부까지 집권하는 통에 사업이 거의 진척되지 못했다. 조 바이든 미 행정부가 이란 핵합의를 복원할 뜻을 밝히고 수에즈운하 좌초 사고까지 터지자 21년 전 협약을 다시 꺼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뜻을 드러낸 셈이다.

이집트와 국경을 맞댄 이스라엘은 에일라트∼아슈켈론 파이프라인(EAP)을 다시 개발할 뜻을 밝혔다. EAP는 홍해에 면한 남부 항구도시 에일라트에서 지중해에 면한 북부 항구도시 아슈켈론을 잇는 254km의 송유관이다. 현재 하루 120만 배럴의 원유를 보낼 수 있으며 시설 개·보수가 이뤄지면 지금보다 몇 배 많은 원유를 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지난해 8월 이스라엘과 국교 정상화를 단행한 UAE는 두 달 후 이스라엘에 EAP 이용을 타진했다. 현재 수에즈운하를 통과할 수 있는 선박 크기는 최대 15만 t이다. 육상 송유관인 EAP를 이용하면 각종 제약이 사라져 원유 수송 경제성이 대폭 높아진다.

문제는 EAP가 활성화하면 인근 수에즈운하가 타격을 받는다는 점이다. 이집트 언론들은 EAP 활성화로 수에즈운하의 연간 매출이 최대 16% 감소할 수 있다고 본다. 이집트는 아랍권 최초로 1979년 이스라엘과 수교했다. 적대적인 이슬람 국가에 둘러싸인 이스라엘로선 이집트와의 우호 관계가 필수다. ‘돈’보다 중요한 ‘생존’이 걸려 있어 이스라엘이 대대적으로 EAP를 개발하긴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제기된다.

사우디아라비아 또한 수에즈운하와 가까운 홍해 신도시 네옴 개발에 사활을 걸고 있다. 당장 큰 위협을 주진 않겠지만 네옴과 주변 인프라가 활성화하고 사우디와 이스라엘 관계가 개선되면 수에즈운하에 타격을 입힐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이희수 성공회대 석좌교수(이슬람문화연구소장)는 “에버기븐호 좌초가 이집트 사회 전반에 생각보다 훨씬 큰 후폭풍을 야기하고 있다. 각국의 우회로 개발 경쟁이 향후 이집트 경제에 계속 위협 요인이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임현석 카이로 특파원 lhs@donga.com
#수에즈 사태#우회로 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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