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롱, 반대 무릅쓰고 나폴레옹 묘역에 헌화한 이유는?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5월 4일 18시 08분


마크롱. AP뉴시스
마크롱. AP뉴시스

“(나폴레옹을) 일방적으로 찬양하거나 저평가하는 건 적절치 않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44)이 유럽 통일을 꿈꿨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 사망 200주년 기념식에서 일각의 반대를 무릅쓰고 헌화하기로 하면서 밝힌 말이다.

프랑스 매체 BFMTV 등에 따르면 마크롱 대통령은 5일 파리 시내 군사문화시설인 ‘앵발리드’에 있는 나폴레옹의 묘역에 헌화하기로 했다. 200주년 행사에 참석해 연설도 할 계획이다. 주간지 르푸앵은 “마크롱은 그간 나폴레옹에 대한 생각을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아 왔다”며 “이번 결정에는 의도가 있다”고 전했다.

내년 4월 대선에서 재선을 노리고 있는 마크롱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 정책 실패로 지지율이 최근 37%까지 하락했다. 이에 우파 유권자의 표심을 얻기 위해 이슬람교 규제, 공권력 강화 등 우향우 정책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이번 나폴레옹 묘역 헌화 역시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지난해 5월 백인경찰의 가혹 행위로 숨진 미국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으로 인종차별 반대운동과 과거 식민지 시대의 반성이 유럽으로도 확산됐다. 이런 상황에서 올해 나폴레옹 사망 200주년이 다가오면서 ‘추모해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크롱 측은 “기념한다고 축하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는 명암을 모두 봐야 한다”고 나선 셈이다.

나폴레옹 이후 2017년 최연소 최고 지도자에 오른 마크롱은 당시 취임하면서 ‘강한 프랑스’를 외쳤다. 헌화 결정에는 젊고 강한 지도자란 이미지를 부각시키고자 하는 의도도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령 코르시카섬 출신의 나폴레옹은 1804년 황제로 즉위한 후 프랑스를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으로 만들었다. ‘국민 영웅’이었던 나폴레옹에 대한 평가는 1900년대 들어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좌파 진영을 중심으로 나폴레옹의 독재성, 자국민 600만 명을 희생시킨 전쟁광 등의 부정적 면이 조명됐다. 특히 1794년 프랑스 대혁명 당시 폐지된 노예제를 나폴레옹이 8년 만에 되살려 ‘인종주의자’ 딱지가 붙기도 했다.

‘강한 지도자’라는 찬사와 ‘인종주의자, 독재자’라는 비판을 동시에 받는 나폴레옹의 양면성 때문에 역대 프랑스 대통령들은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나폴레옹을 평가했다.

자크 시라크 전 대통령은 2004년 12월 나폴레옹의 노트르담 황제 즉위식 200주년 행사, 2005년 나폴레옹의 아우스터리츠 전투 승리 200주년 행사에 불참했다.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프랑수아 올랑드 전 대통령도 나폴레옹과 일정 거리를 뒀다.

나폴레옹.
나폴레옹.
반면 166cm 작은 키와 헝가리 이민 2세 비주류 출신인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은 강한 추진력과 카리스마를 내세워 ‘제2의 나폴레옹’이란 이미지를 적극 차용했다. 조르주 퐁피두 전 대통령은 1969년 나폴레옹 탄생 200주년을 맞아 그의 고향 코르시카섬을 찾아 연설했다. ‘위대한 프랑스’를 외쳤던 샤를 드골 전 대통령은 “우리에겐 나폴레옹이 있다”고 강조했다.

대통령 뿐 만이 아니다. 도미니크 드 빌팽 프랑스 전 총리는 나폴레옹의 혁명정신을 조명한 책, 리오넬 조스핀 전 총리는 나폴레옹의 악행을 비판하는 책을 각각 출판했다. 내년 대선 후보 중 한명인 안 이달고 현 파리 시장은 나폴레옹이 부활시킨 노예제 재확산에 맞선 흑인 여성 설리티드의 이름을 딴 공원을 지난해 9월 파리 도심에 열기도 했다. 설리티드는 19세기 초 카리브해 지역 프랑스 영토 과들루프 섬에서 노예제 반대를 주장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마크롱 나폴레옹 합성 이미지. SNS 캡처
마크롱 나폴레옹 합성 이미지. SNS 캡처
이같은 논란 속에 프랑스 주요 정치인들이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봉쇄조치로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다는 후문도 나오고 있다. 방역조치로 대형 행사나 모임이 제한돼 ‘코로나19로 나폴레옹 행사에 가고 싶어도 갈수 없었다’고 핑계를 댈 수 있다는 것이다. 나폴레옹 재단 이사인 티에리 렌츠는 “정치인들이 코로나19 탓을 하며 200주년 행사에 오지 않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파리=김윤종 특파원zoz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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