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물가 상승 압력이 고조되면서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완화적인 통화 정책을 거두고 긴축으로 돌아서는 방안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연준은 경기 과열과 인플레이션에 대한 잇단 우려에도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면서 금리 등 통화정책 기조를 바꿀 뜻이 없다고 반복적으로 밝혀 왔다. 시장에서는 연준이 현재 매월 1200억 달러(약 136조 원)에 이르는 자산 매입 규모를 축소하는 방안부터 우선 검토할 것으로 보고 있다.
연준이 19일(현지 시간) 공개한 4월 27, 28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의사록에 따르면 몇몇 참석자는 “경제가 위원회의 목표를 따라 빠른 진전을 이룬다면 향후 어느 시점에는 자산 매입 속도 조절 계획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는 게 적절하다”는 의견을 냈다.
팬데믹 이후 FOMC 의사록에서 자산 매입 축소 가능성이 언급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로이터통신은 “지금까지 연준의 테이퍼링(자산 매입 축소) 가능성에 대한 가장 명시적인 언급”이라고 전했다. 연준은 지난해 3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 대응해 금리를 제로 수준(0.00∼0.25%)으로 낮춰 1년 넘게 유지하고, 월 1200억 달러의 자산 매입을 통해 시중에 막대한 돈을 풀어왔다. 연준이 조만간 긴축정책을 단행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면서 국내외 증시는 약세를 보였다. 이날 뉴욕 증시에서 다우존스산업평균지수는 0.48% 하락했고, 10년 만기 국채 금리도 오후 한때 1.692%까지 상승(채권 가격은 하락)했다. 20일 한국 코스피도 내내 약세를 이어가다 전 거래일보다 0.34% 내린 채 마감됐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의 움직임에 금융시장이 이처럼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2013년 세계를 뒤흔들었던 ‘긴축 발작(Taper Tantrum)’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당시 미국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벗어나 경제가 어느 정도 회복됐다는 판단 아래 시중에 돈을 푸는 양적완화를 축소하겠다는 뜻을 내비쳤고 이에 세계 금융시장이 패닉에 빠졌다. 연준이 긴축 신호를 보내자 글로벌 시장의 자금이 미국으로 유턴하게 됐고 경기 침체의 터널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신흥국 금융시장이 큰 피해를 입게 된 것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경기 회복 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는 지금의 상황도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연준과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글로벌 금융위기 때에 못지않은 대규모 부양책을 집중적으로 쏟아냈다. 하지만 이제 경기 부양의 효과가 나타나고 경제 재가동이 시작되면서 미국은 오히려 경기 과열과 인플레이션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연준은 그동안 인플레 우려가 나올 때마다 “아직은 경제지표가 목표치에 미달하고 있다” “경기 회복세를 더 지켜봐야 한다”는 등의 이유로 금리 인상 가능성을 일축해 왔지만 최근에는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신호를 시장에 보내고 있다. 이달 6일 발간한 금융안정보고서에서도 연준은 “주식 등 위험자산의 가치가 일부는 역대 최고 수준”이라며 “이런 위험 선호 현상이 꺼지면 자산가격이 급락할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19일 공개된 의사록을 보면 지난달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에서도 일부 참석자들은 “인플레이션 압력이 곧 반갑지 않은 수준까지 올라갈 위험이 있다”면서 경제지표를 너무 신중하게 들여다보지 말고 빨리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실제로 지난달 말 회의가 열린 뒤 이달 12일 발표된 4월 물가상승률은 4.2%로 13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까지 치솟아 시장을 놀라게 했다. 이처럼 예상 밖의 높은 물가지표를 마주하게 된 연준이 적어도 다음 회의 때는 긴축 여부를 더 진지하게 논의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회의에서 많은 참석자들은 연준이 본격적인 자산 매입 축소를 시작하기 전에 시장에 사전 경고를 충분히 줘야 한다는 견해도 제시했다.
연준의 주요 인사들도 최근 들어 긴축에 대한 논의가 가까워졌음을 시사하는 발언들을 쏟아내고 있다. 제임스 불러드 세인트루이스 연방은행 총재는 19일 기자들과 만나 “팬데믹이 물러가고 다시 확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통화정책을 조정하는 것에 대해 얘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아직 그 지점에 와 있지는 않지만 가까워지고는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래피얼 보스틱 애틀랜타 연방은행 총재도 블룸버그TV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경제 동향과 정책 대응을 모니터링하는 데 있어 매우 기민해야 한다”면서 연준의 정책 기조가 바뀔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러나 연준의 긴축 전환이 임박했다고 장담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게 나오고 있다. 이 문제를 둘러싼 연준 내부의 의견이 아직 팽팽하게 갈려 있기 때문이다. 랜들 퀄스 연준 부의장은 이날 하원 청문회에 참석해 “현재 물가 압력은 경제가 재가동하며 생긴 일시적인 현상이며 이 판단이 틀린 것으로 밝혀지면 연준은 즉각 인플레이션의 고삐를 죌 준비가 돼 있다”면서도 “그러나 인플레이션에 너무 앞서서 대응하면 경기 회복을 상당히 위축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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