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현지 시간) 네덜란드 왕위 계승 1순위 카타리나아말리아 공주(18)가 “연 160만 유로(약 22억 원)의 수당 및 생활비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한 후 달라진 세상의 기준에 부응하려는 주요국 왕실의 변신이 주목받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양극화 등으로 왕실을 ‘세금 먹는 하마’로 보는 시선이 늘어나면서 왕실 구성원들 또한 각종 혜택을 먼저 포기하고 몸을 낮추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군주제 폐지 여론 또한 상당하다. 특히 젊은 세대일수록 왕실을 거추장스럽고 불필요한 존재로 여기는 경향이 뚜렷하다. 왕실모독죄가 있을 정도로 군주에 대한 절대 충성을 요구하는 태국에서조차 밀레니얼세대들이 “우리에게 왕은 필요 없다”며 반정부 시위에 나서고 있다.
○ 왕실의 구조조정
영국 시사매체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군주제를 택하고 있는 나라는 2019년 기준 44곳. 대부분 입헌군주제 국가로 민주주의가 발달한 유럽 국가들이 많이 알려져 있다. 영국 경제 분석 기관 이코노미스트인텔리전스유닛(EIU)이 지난해 발표한 세계 민주주의 지수에서 1위를 차지한 노르웨이를 비롯해 스웨덴(3위), 덴마크(7위), 네덜란드(10위), 룩셈부르크(13위), 영국(16위), 일본(21위), 스페인(22위)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나라의 왕실은 여러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있다.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왕위 계승자와 그 직계 후손을 제외한 기타 왕실 인사의 수를 줄이고 왕실 예산을 대폭 축소 운용하는 것이다.
1973년 왕위에 오른 스웨덴 국왕 칼 구스타프(75)는 3월 여덟 번째 손주 ‘줄리안’을 얻었다. 이 아기는 ‘왕자’가 아니다. 1남 2녀를 둔 구스타프 국왕은 2019년 10월 왕실 일원을 본인 부부, 세 자녀와 배우자, 왕위 계승자 빅토리아 왕세녀(44)의 1남 1녀로 제한했다. 이에 필리프 왕자(42), 마델레이네 공주(39)가 낳은 국왕의 손주 6명은 ‘왕자’ ‘공주’ 호칭으로 불릴 수 없다. 왕실 가족에게 지급되는 돈도 받지 못한다.
스웨덴 왕실은 줄리안이 태어난 뒤 아기의 사진도 단 1장만 공개했다. 8월 세례식 또한 비공개로 치러진다. 최근까지도 왕실 일가의 세례식을 공영 SVT방송에서 대대적으로 생중계한 것과 대조적이다.
스페인 국왕 펠리페 6세(53)는 2014년 즉위하자마자 “향후 1년간 왕실 가족이 자유 여행을 하거나 사치품을 선물 받는 것을 금한다. 왕실 수입도 투명하게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현직 국왕이 받는 왕실 수당(23만4000유로·약 3억2000만 원)의 20%도 자진 삭감했다.
그 역시 왕족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왕실 구성원을 본인 부부와 딸 둘, 부친 후안 카를로스 1세 전 국왕(83)과 어머니 소피아 왕대비(83)로 제한했다. 엘레나 공주(58)와 크리스티나 공주(56) 등 누나 2명, 누나의 배우자와 자녀, 사촌 등에게 제공했던 혜택은 모조리 없앴다. 지난해 3월에는 전직 국왕에게 지급하는 연금 20만 달러도 없앴다.
이 과정에서 누나 등 일부 가족과 사이가 멀어졌음에도 그가 개혁을 추진한 이유는 부친에 관한 각종 추문으로 왕실 인기가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이 사망한 직후인 1975년 즉위한 후안 카를로스 1세는 한때 군부의 쿠데타 위협을 막아내는 등 ‘스페인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불렸다. 스페인 경제 위기가 한창이던 2012년 내연녀와 함께 아프리카 보츠와나에서 코끼리 사냥에 나서 국민적 공분을 사고 퇴위했다. 과거 스페인 기업이 수주한 사우디아라비아 고속철 사업비 지급 지연 문제를 중재해 주는 대가로 사우디로부터 1억 달러(약 1140억 원)를 뇌물로 받고 스위스 비밀계좌에 은닉한 혐의까지 드러났다.
현재 스페인과 스위스 양국 모두의 사법 수사를 받고 있는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지난해 8월 아랍에미리트(UAE)로 사실상 망명했다. 크리스티나 공주 부부 또한 탈세와 사기 사건에 연루됐다. 이로 인해 한때 70%를 웃돌던 군주제 지지 여론이 지난해 한때 40%대까지 떨어졌다.
1972년 즉위한 덴마크 마르그레테 2세 여왕(81)은 지난해 4월 80세를 맞았지만 모든 생일 행사를 취소했다. 덴마크 왕실에서는 국왕의 생일에 꽃을 선물해주는 전통이 있는데 이것도 받지 않겠다고 했다. 여왕은 “나 대신 코로나19로 어려움에 처한 노인들에게 꽃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여왕은 70세 생일 때 전 세계 왕족을 초청해 왕립 극장에서 공연을 관람했다. 수도 코펜하겐 시내에서 마차 행진을 하고 대형 연회도 개최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발발한 와중에 성대한 잔치가 무리라는 판단으로 80세 생일을 조용히 보냈다. 올해 4월 81세 생일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난해 4월 모나코 왕실 또한 “코로나19로 왕실 재정의 40%를 감축하기로 했다”며 연 예산을 기존 1320만 유로(약 178억 원)에서 800만 유로(약 108억 원)로 줄였다.
○ 젊은 층의 군주제 반감 상당
태국은 2016년 마하 와치랄롱꼰 국왕(69)의 즉위 후 군주제에 대한 젊은 층의 반감이 특히 커진 나라로 꼽힌다. 그의 부친은 70년간의 재위 기간 내내 ‘생불(生佛)’로 불릴 만큼 국민의 절대적 존경과 지지를 받은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1927∼2016). 반면 와치랄롱꼰 국왕은 수백억 원이 들어간 초호화 대관식을 열었다. 4번 결혼했고 여러 내연녀를 둔 복잡한 사생활 또한 비판받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지난해 태국 왕실 예산은 2억9000만 달러(약 3300억 원)로 세계 왕실 중 최고 수준이다. 같은 기간 영국 왕실 예산(6940만 파운드·약 1100억 원)의 3배에 달한다. 그런데도 와치랄롱꼰 국왕은 2018년 그간 왕실자산국(CPB)이 관리했던 400억 달러(약 45조5000억 원)의 왕실 자산을 직접 관리하겠다고 밝혀 국민 반감을 키웠다. 지난해 9월에는 관광업 의존도가 높은 태국이 코로나19 직격탄을 맞고 있는데도 그가 여러 여성을 대동한 채 독일의 호화 휴양지에서 지냈다는 보도가 나와 민심이 들끓었다.
이에 상당수 젊은이들은 지난해부터 ‘왕실 개혁’ 등을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일부 과격파는 군주제 폐지, 국왕 퇴위 등을 거론한다. 푸미폰 전 국왕에 대한 향수가 강한 장노년층과 다른 점이다.
영국에서도 젊은 층을 중심으로 군주제 폐지 목소리가 높다. 지난달 유고브 여론조사에 따르면 18∼24세 영국인의 31%만이 “군주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답했다. 65세 이상 고령자의 81%가 군주제를 찬성한 것과 대조적이다.
헬스트레이너 남편 둔 왕세녀… 미혼모와 결혼한 왕세자
왕실 인기 좌지우지하는 왕족 혼사
몇십 년 전만 해도 각국 왕족들은 대부분 같은 왕족 혹은 귀족 출신 인사와 결혼했다. 최근 일반인과의 결혼이 늘면서 왕족 혼사 역시 왕실 인기를 좌우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일반인과 결혼한 후 잘 사는 왕족의 모습은 군주제에 대한 반감을 누그러뜨린다는 평을 받고 있다. 자신의 헬스 트레이너였던 다니엘 베스틀링(48)과 8년간 연애 끝에 결혼한 스웨덴 빅토리아 왕세녀 부부는 동네 이웃 같은 소탈하고 친근한 이미지를 유지해 국민들의 고른 지지를 받고 있다.
배우자의 논란 있는 과거는 여론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 카타리나아말리아 공주의 부모인 빌럼 알렉산더르 네덜란드 국왕(54)과 막시마 왕비(50) 부부가 대표적이다. 막시마 왕비의 부친은 아르헨티나 군사독재 시절 농업장관을 지낸 호르헤 소레기에타다. ‘독재자의 딸을 용납할 수 없다’는 비판이 거세지자 부부는 2002년 결혼식과 2013년 빌럼 알렉산더르 국왕의 즉위식에 모두 소레기에타를 초청하지 않았다.
노르웨이 하랄 5세 국왕(84)의 아들로 현재 대리청정 중인 호콘 왕세자(48)는 2001년 메테마리트 왕세자빈(48)과 결혼했다. 왕세자빈이 마피아 두목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둔 미혼모였던 데다 마약 복용 사실까지 알려져 반대 여론이 상당했다. 당시 90%를 넘나들었던 왕실 지지율 또한 절반으로 곤두박질쳤다. 두 사람이 결혼 후 두 자녀를 낳고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자 여론이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최근 일본에서는 나루히토(德仁·61) 일왕의 조카 마코(眞子·30) 공주의 결혼이 뜨거운 감자다. 마코 공주는 2017년 “동갑내기 캠퍼스 커플인 고무로 게이와 내년에 결혼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고무로의 어머니가 과거 교제했던 남성에게 400만 엔(약 4000만 원)을 빌렸다가 갚지 않았다는 소위 ‘빚투’가 터지면서 결혼이 연기됐다. 이후 고무로는 미국 유학을 떠나 반대 여론이 잦아들기를 기다렸고 최근 귀국을 추진하고 있다. 공주의 결혼이 임박했다는 보도가 잇따르자 다시 반대 여론이 들끓는다. 올해 3월 주간지 아에라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97.6%가 마코 공주의 결혼에 대해 “좋지 않다”고 답했다.
이는 세금이 고무로 가족의 ‘빚잔치’에 쓰일 가능성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남성 승계만 가능한 일본 왕실에서 공주는 결혼과 동시에 왕족 자격을 상실한다. 그 대신 지참금을 최대 1억5000만 엔(약 15억 원)까지 받을 수 있다. 마코 공주가 결혼하면 그가 받을 지참금이 예비 시어머니의 빚을 갚는 데 쓰일지 모른다는 우려가 반대 여론으로 이어진 셈이다. 일왕 또한 2월 “많은 사람이 납득하고 기뻐하는 상황을 바란다”며 조카의 결혼에 부정적인 의사를 넌지시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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