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후면 미국 독립기념일입니다. 영어로는 ‘인디펜던스 데이’라고 하죠. 그런데 요즘 미국에서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습니다. 독립기념일 뿐만이 아닙니다. 다른 공휴일도 개명해야 한다고 하네요. 우리나라는 대체공휴일 문제로 뜨겁지만 미국은 조금 다른 앵글의 ‘공휴일 고민’이라 할 수 있죠.
미국인들이 많이 읽는 ‘아메리칸 헤리티지’라는 역사 사전에는 ‘미국의 폭력’이라는 챕터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첫 문장으로 “미국 역사에서 폭력은 가장 원초적 문제였다”고 나와 있습니다. 널리 알려졌듯 미국 역사는 침략의 역사이고, 정복의 역사입니다. 아메리카 대륙에 첫 발을 디딘 개척자들은 원주민과 싸웠고, 식민 상태에 벗어나기 위해 미국은 영국과 대결했으며, 남북전쟁 때는 나라가 두 쪽으로 갈라져 피 비린내 나는 전쟁을 벌였습니다. 노예 제도를 둘러싼 흑백 대립도 심각했습니다. 미국인들은 “폭력을 통해 현재의 민주주의를 얻었다”고 위로하지만 과거가 피로 점철됐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공휴일의 대부분이 폭력의 역사, 그리고 그 안에서 이름을 날렸던 인물들을 기리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대부분 국가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폭력적 면모를 갖고 있지만 짧은 기간 안에 국가를 세우고 분열을 잠재웠던 미국은 폭력의 강도가 매우 높습니다.
‘휴일 개명(Rename Holidays)’은 휴일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이름에서 폭력적 색채를 덜어내야 한다는 운동입니다. 지난 수십 년간 꾸준히 전개돼온 운동이지만 최근 갑자기 뜨거워졌습니다. 사회적 분위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이 칼럼에서 지적했듯이 요즘 미국은 ‘우오크(woke)’ 즉 ‘깨어나라’ 정신이 대세입니다. 약자 입장에서 세상을 봐야 한다는 일종의 ‘정치적 올바름’ 운동이지요. 강자의 역사를 기념하는 날인 휴일을 이름만이라도 약자를 배려하는 식으로 바꿀 것을 우오크 시대 정신은 요구하고 있습니다.
독립기념일의 배경에는 독립 전쟁이라는 영국과의 폭력적 대결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개명론자들은 독립기념일이 결국 후세에 평화를 물려주기 위해 싸운 날이라는 점을 강조해 ‘피스데이 원(평화의 날 1)’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피스데이’ 뒤에 ‘원’이 붙는 것은 두루뭉술한 의미의 ‘피스데이’는 웬만한 곳에 다 갖다 붙일 수 있는 다목적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피스데이 투’도 있고, ‘쓰리’도 있습니다. 미국의 현충일 격인 ‘메모리얼 데이(전몰자 추도기념일·5월 마지막 주 월요일)’에는 ‘피스데이 투,’ ‘마틴 루터 킹 데이(마틴 루터 킹 목사 기념일·1월 세 번째 주 월요일)에는 ’피스데이 쓰리‘라는 이름이 적절하다고 합니다. 킹 목사는 사회적 약자인 흑인 인권을 위해 싸웠으므로 그의 기념일은 개명 대상이 아닐 수도 있지만 특정 인물을 기리는 날은 결국 개인 우상화 위험이 있다 해서 ’피스데이‘군에 합류하게 됐습니다.
가장 확실하게 개명 움직임이 일고 있는 날은 ’콜럼버스 데이(10월 두 번째 주 월요일)‘입니다.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것을 기념하는 날로 1937년 연방 공휴일로 지정됐습니다. 많은 지자체들이 회의를 거쳐 ’콜럼버스 데이‘라고 하지 않고 ’인디지너스 피플스 데이(원주민의 날)‘라고 부를 것을 정식 결의했습니다.
그러자 콜럼버스가 태어난 나라인 이탈리아가 들고 일어났습니다. 미국 내 이탈리아 커뮤니티는 “왜 수십 년 동안 잘 불러오다가 갑자기 없애느냐”고 반발했습니다. 꼭 개명을 해야 한다면 ’원주민의 날‘이 아닌 ’이탈리아 유산의 날(이탈리안 헤리티지 데이)‘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이렇게 개명은 쉽지 않습니다. 반대하는 이익 집단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휴일 개명 운동은 이념 대결 양상도 보이고 있습니다. 개명을 주장하는 쪽은 진보 세력이고, 반대하는 쪽은 보수파입니다. 보수 운동가들은 “왜 역사를 부정하느냐”며 “오랜 전통으로 이어져온 휴일 이름을 바꿔 혼란을 자초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역사수정주의에 입각해 미국의 과거사를 일일이 들춰보자면 사실 남아나는 게 없을 정도로 대부분의 공휴일은 개명 대상입니다.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부활절, 재향군인의 날, 대통령의 날 등이 모두 개명 대상으로 오르내립니다.
최근 뉴저지 주 랜돌프 고교 사례는 휴일 개명이 얼마나 쉽지 않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총 학생수 1500여명의 이 작은 학교가 전국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이유는 가을부터 시작되는 올해 학사 일정을 공개하면서 공휴일 명칭을 생략했기 때문입니다. 각각의 공휴일 명칭을 쓸 경우 누군가의 반발을 살 것을 우려해 아예 생략하고, ’학교 문 닫는 날(School Closed)‘ ’쉬는 날(Days Off)‘ 등의 큰 제목 아래로 날짜만 공고했습니다. 오랫동안 익숙하게 봐온 공휴일 명칭이 사라진 것에 반발한 학부모들이 생략 결정을 내린 학교 이사회 퇴진을 위한 서명 운동에 돌입하면서 학교가 이념 대결의 장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공휴일 개명은 역사 바로 잡기 차원에서 바람직한 일입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유지돼온 휴일 이름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고 쉽게 고쳐지기도 힘듭니다. 바짝 코앞으로 다가온 독립기념일부터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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