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린 거장인 핀커스 주커만(73)이 아시아계 학생들에게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했다가 논란이 되자 뒤늦게 사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스라엘 출신의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지휘자인 그는 공연을 위해 한국도 여러 차례 방문한 바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아시아계 음악인들이 미국 클래식 음악계의 인종차별 문제를 겨냥해 집단 대응에 나서고 있다.
12일(현지 시간) 재미 한국계 음악인 커뮤니티와 클래식 음악 매체인 바이올리니스트닷컴에 따르면 주커만은 지난 달 25일 줄리아드 음악원의 초청으로 온라인에서 마스터 클래스(공개 레슨)를 열었다. 그는 아시아계 학생 2명의 라이브 연주를 들은 뒤 “거의 완벽하다. 칭찬이다”라면서 “그런데 완벽하게 연주하는 것은 덜 생각하고 프레이징(선율을 잘 분절해 연주하는 기법)을 더 생각하라. 식초 또는 간장이 조금 더 필요하다”면서 웃었다.
학생들이 연주를 더 해보자 그는 “바이올린은 노래하는 악기다. 노래를 불러보라”면서 “한국인들은 노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고 말했다. 악기를 연주할 때 ‘노래를 한다’는 것은 악보대로 정확히 연주해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곡을 서정적으로 잘 표현해 낸다는 뜻으로 쓰인다. 그는 한국 연주자들의 표현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이 때 한 학생이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고 말하자 주커만은 “그럼 어디 출신이냐”고 물었고 이 학생은 다시 “절반은 일본 피가 섞였다”고 답했다. 그러자 주커만은 “일본인들도 노래하지 않는다”면서 아시안 흉내를 내 노래를 부르더니 “이렇게 하면 노래가 아니다. 또 바이올린은 기계가 아니다”고 했다. 순간 학생들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고 한다. 주커만은 행사가 끝날 무렵에도 “한국인들은 노래하지 않는다. 그건 그들의 DNA에 없다”고 재확인했다. 주커만의 이날 레슨은 100여 명의 학생과 교수들이 지켜보고 있었고, 이날 발언은 즉각 파문을 일으켰다.
주커만은 그 다음주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지난 마스터 클래스에서 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재능이 충만한 두 명의 젊은 음악인들에게 뭔가를 소통하려고 했지만 내가 사용한 말은 문화적으로 무감각한 것들이었다”며 “이 학생들에게도 개인적으로 사과의 글을 쓴다.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어서 죄송하다. 돌이킬 수는 없지만 진실된 사과를 전한다. 이로 인해 값진 뭔가를 배웠다. 앞으로 더 잘 하겠다”고 했다.
주커만이 교수로 재직 중인 맨해튼음대(MSM) 제임스 갠드리 학장도 교직원과 졸업생 등에게 서신을 보내 주커만의 발언이 논란이 됐다는 사실을 알렸다. 갠드리 학장은 “그의 사과가 적절한 조치라고 생각하지만 마스터클래스 도중 그가 표현한 말이나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며 “주커만과 얘기를 나눴고 그가 뉘우치고 있다고 했다”고 전했다. 주커만을 초청한 줄리어드 음악원도 “그의 무감각한, 그리고 모욕적인 문화적 고정관념에서 나온 발언은 우리의 가치를 대표하지 않는다”면서 이날 마스터클래스 영상을 비공개로 전환하고 참석자들에게도 사과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런 뒷수습에도 불구하고 미국 내 아시아계 음악인들의 분노는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달 9일 페이스북에는 클래식 음악계의 인종차별에 맞서기 위한 모임이 만들어졌다. ‘아시안 뮤지션 얼라이언스 커뮤니티’라는 이름의 이 그룹에는 사흘 만에 250여 명이 가입했다. ‘보이콧 주커만’이라는 해시태그도 이들 사이에 확산되고 있다. 이들은 주커만의 사과나 MSM 등의 사후 조치가 충분치 않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또 주커만이 이전에도 아시아계 학생들을 향해 인종과 관련한 문제 발언들을 여러 차례 해왔다는 증언들도 속속 나오고 있다. 그는 1967년 당시 가장 권위가 있던 레벤트리트 콩쿠르에서 한국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와 공동 우승한 바이올린의 거장이다. 이를 계기로 그는 정경화와 오랜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도 이 논란을 보도하면서 “미국에서 아시아계 연주자들은 너무 기계처럼 연주하고 감정이 없다는 인종적 편견에 시달려 왔다”면서 “최근 아시아계 혐오가 생기면서 이에 대한 음악계의 우려도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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