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1월 첫 집권 후 4선(選)에 성공해 지난 16년간 ‘전 세계의 지도자’, ‘각국 정상이 존경하는 정상’으로 불렸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67)가 9월 정계 은퇴를 앞두고 잇단 악재에 직면했다. 국내에서는 이달 중순 서유럽 전역을 강타한 유례없는 홍수로 독일에서만 최소 197명이 숨지자 치수(治水)와 재해 대응에 실패했다는 비판이 거세다. 나라 밖에서는 그가 독일 생명공학기업 바이오앤테크와 미국 제약사 화이자가 공동 개발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의 지식재산권 유예에 반대하고 있다며 “자국 이기주의를 탈피하라”는 압박이 들어온다.
이 와중에 메르켈의 뒤를 이어야 할 집권 기독민주당의 아르민 라셰트 대표(60)는 홍수 피해 현장에서의 부적절한 처신, 메르켈에 비해 빈약한 존재감과 인지도로 고전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9월 독일 총선에서 기민당의 승리가 불투명하다는 전망도 나온다. 1989년 정계 입문 후 32년 정치 역정의 마지막에서 위기를 맞은 메르켈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 홍수에 떠내려간 ‘무티 리더십’
14일(현지 시간)부터 시작된 서유럽의 유례없는 폭우로 독일에서 대규모 인명피해가 발생하자 언론은 메르켈 정권이 재난 대책을 수립하는 데 안이했다며 질타하고 있다. 기상학자들이 이번 폭우가 대홍수로 번질 가능성을 경고했지만 연방정부가 대피 명령을 일찍 내리지 않는 등 ‘자연재해’가 아닌 ‘인재(人災)’란 비판이다. 독일과 국경을 맞댄 네덜란드에서는 철저한 사전 준비로 단 한 명의 사망자가 없었던 것과도 대조적이다. 시사지 슈피겔은 21일 “연방기상청과 지방정부 간 심각한 소통 문제가 있었다”며 국민들이 제때 경고를 받지 못해 피해가 커졌다고 지적했다.
메르켈은 18일 피해가 컸던 남서부 라인란트팔츠주 슐트를 찾았지만 이곳에서 한 발언 또한 적절치 못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메르켈은 거듭 “홍수는 기후변화 때문이며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대대적 투자를 단행하겠다”고 강조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가족과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은 수재민 앞에서는 위로, 상세한 재건 계획, 재발 방지 대책 등을 내놓는 것이 먼저라는 지적이다.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로 평소 ‘무티(Mutti·엄마) 리더십’으로 불릴 만큼 남다른 포용력과 공감능력을 자랑해온 그의 장점이 이번 위기에서 발휘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간지 디벨트는 “후진국 수준의 재난 대응 체계가 드러났는데도 기후변화 타령만 한다”고 꼬집었다. 공영방송 DW는 “정부가 스마트폰을 통한 모바일 경보 체제를 구축했어야 했다”고 가세했다. 하지만 메르켈은 수해 현장에서 “휴대전화가 고장 나면 경보를 받지 못할 것이고 모바일 경보를 항상 신뢰할 순 없다”며 부정적인 의견을 나타냈다.
● 차기 구도 불확실
1월 기민당의 새 수장이 된 라셰트 대표 역시 미덥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메르켈은 2018년 12월 “네 번째 임기가 끝나는 2021년 9월 정계에서 은퇴하겠다”며 기민당 대표직을 내려놨다. 후임자였던 아네그레트 크람프카렌바워 전 국방장관(59)은 한때 ‘포스트 메르켈’로 불렸고 2연속 여성 총리가 탄생하는 것 아니냐는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지난해 튀링겐주 지방선거 당시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과 손잡자 당 안팎에서 비판이 거셌다. 선거 승리를 위해 나치 추종자와 결탁한 사람은 지도자로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결국 그는 대표직을 사퇴했고 총리직에도 도전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후 기민당 수장에 오른 라셰트는 메르켈의 최측근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17일 홍수의 주요 피해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에르프트슈타트를 방문한 자리에서 부적절한 행동으로 도마에 올랐다. 그는 독일 16개주 중 인구가 가장 많고 부유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현직 주지사이기도 하다. 라셰트는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이 희생자 애도 연설을 하는 동안 뒤편에 서서 옆 사람들과 농담을 주고받고 혀를 내밀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 장면이 전국에 생중계되자 제1야당 사회민주당은 즉각 “무례하고 소름 끼친다”고 비판했다. 영국 더타임스는 “라셰트의 잘못된 판단으로 그에 대한 불만이 확산됐다. 9월 총선에서 승리하려던 그의 계획 또한 차질을 빚고 있다”고 전했다.
기득권 백인 남성의 이미지가 강한 라셰트가 성(性)평등, 난민, 기후변화 등의 난제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을지 의문이란 지적도 나온다. 아날레나 베르보크 녹색당 대표(41)가 탄소중립 정책, 신선한 이미지 등을 앞세워 환경에 민감한 젊은 유권자를 집중 공략하는 것과 비교된다. 기민당이 홍수 피해를 어떻게 수습하느냐에 따라 9월 총선의 승자가 가려질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 꼬인 독-미 관계
메르켈은 집권 중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 도널드 트럼프, 조 바이든 등 4명의 미 대통령을 상대했다. 부시와 오바마는 재임 중은 물론 퇴임 후에도 수차례 메르켈에 대한 호감을 나타내고 그의 지도력을 호평했다. 하지만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우며 동맹을 경시한 트럼프 전 대통령과의 관계는 최악이었다.
“미국이 돌아왔다”며 다시 ‘동맹 복원’을 내세운 바이든 행정부는 겉으로는 독일을 최고 우방이라고 치켜세우고 있다. 하지만 코로나19 백신 지식재산권 유예 반대, 독일과 러시아의 가스관 협력사업 ‘노르트스트림2’ 등 독일의 주요 정책에 못마땅하다는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미국은 독일이 미국의 적성국인 러시아에 주요 에너지원을 의존하기 시작하면 미국과 독일의 관계도 훼손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2014년 자국 영토인 크림반도를 러시아에 강제로 뺏긴 후 러시아와 대립하고 있는 우크라이나도 노르트스트림2가 자국 가스관을 우회해 우크라이나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줄 것이라고 불만을 제기한다. 미 정치매체 더내셔널뉴스가 18일 “워싱턴과 베를린 사이에 틈이 생겼다”고 진단한 이유다.
미국은 독일의 대중(對中) 정책에도 못마땅하다는 심기를 표출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달 영국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중국의 신장위구르 인권탄압, 대만 압박 등을 질타하는 공동성명서 발표를 주도했다. 메르켈은 성명 발표 직후 “중국은 많은 문제에서 우리의 경쟁자지만 동시에 파트너이기도 하다”며 이번 성명을 무조건 ‘반중’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는 뜻을 드러냈다. 미국 입장에서는 상당히 김이 빠지는 발언으로 비칠 수 있다.
미국의 다른 우방인 호주가 중국과의 투자협정까지 폐기하며 미국의 반중 노선에 동참하는 것과 달리, 독일이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이유는 중국이 독일의 최대 교역국이기 때문이다. 독일 연방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중-독 교역 규모는 2129억 유로(약 288조5817억 원)로 미-독 교역(1715억 유로·약 232조4545억 원)보다 훨씬 많았다. 미 정치매체 더글로벌리스트의 슈테판괴츠 리히터 편집장은 “메르켈이 중국의 중요성만 반복적으로 언급한다. 특히 독일 자동차산업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것이 짜증 난다”며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메르켈이 거듭 자국 기업의 코로나19 백신 지식재산권을 보호하겠다고 밝힌 것에 대한 미국 내 비판 여론 또한 상당하다. 15일 메르켈이 미 워싱턴에서 바이든 대통령과 회담했을 때 미 시민단체들은 백악관 앞에서 ‘메르켈 반대 시위’를 열었다. 집권 민주당 의원들도 이 주장에 동조했다. 미 정치매체 아메리칸 프로스펙트는 “목사의 딸인 메르켈이 양심을 돌아봐야 한다. 미국 또한 메르켈 압박을 계속해야 한다”고 비난했다. 모두 과거 메르켈이 미국 땅을 밟았을 때 찾아보기 어려웠던 광경이다.
● EU의 실질적 수장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메르켈이 21세기 국제사회에 중요한 이정표를 남긴 지도자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의 16년 집권의 공(公)을 제대로 기려야 하며, 그가 퇴임하면 독일은 물론 유럽연합(EU)과 국제사회 또한 그 정도의 영향력과 위상을 지닌 지도자를 만나기 어려울 것이란 평가도 꾸준히 나온다.
우선 메르켈은 ‘녹슨 전차’로 불리던 독일을 미국, 중국 등에 맞먹는 세계 최강대국으로 변화시켰다. 2005년 취임 당시 독일은 10%가 넘는 높은 실업률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상 최대인 520만 명이 직장을 잃은 채 신음하고 있었다. 핵심 산업이던 자동차, 중공업 등도 일본 등 아시아 국가의 추격으로 경쟁력이 떨어졌고 경제성장률은 사실상 제로(0) 상태였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2005년 2조8460억 달러(약 3271조 원)였던 독일 국내총생산(GDP)은 지난해 3조3780억 달러(약 3883조 원)로 늘었다. 미국 중국 일본에 이은 세계 4위다. 같은 기간 1인당 GDP도 3만4500달러(약 3966만 원)에서 4만6500달러(약 5345만 원)로 증가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증권거래소의 종합주가지수(DAX)는 4,300에서 15,500으로 세 배 이상 뛰었다. 10.7%에 달하던 실업률 또한 3분의 1 수준인 3.3%로 떨어졌다. 부부 합계 출산율도 1.34명에서 1.57명으로 늘었다.
대외적으로도 그는 국제사회에서 주요 분쟁이 벌어질 때마다 ‘갈등 조정자’ 역할을 수행했다. EU 곳곳에서 갈등이 벌어질 때마다 이를 중재하며 유럽을 하나로 묶은 ‘EU의 정신적 지주’로 평가받는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여파로 2010년부터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 등 남유럽 재정위기가 발발했을 때 메르켈은 지원 대가로 강력한 긴축을 요구했다. 해당 국가가 거세게 반발했지만 끝까지 이를 관철시켜 유럽 전체의 경제회복 대책을 주도했다. 2014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강제합병, 2015년 시리아 난민 유입 위기 당시 각종 대책을 마련하고 중재 회의를 주재한 사람도 메르켈이었다. EU 탄생 후 최대 위기로 꼽히는 2016년 영국의 EU 탈퇴(브렉시트) 당시에도 그는 동조 탈퇴를 거론하는 일부 회원국을 설득했고 영국과의 이혼 협정, 즉 브렉시트 협상도 주도했다.
이런 그가 ‘EU의 실질적 수장’ ‘유럽 합중국 대통령’이라는 것에 이견을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다. 주요 외신이 그를 19세기 독일의 통일을 이끈 오토 폰 비스마르크 총리, ‘철의 여인’이라 불리는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에 빗대 ‘새로운 비스마르크’, ‘게르만 철의 여인’ 등으로 부르는 이유다. 14일 미 CNN은 “메르켈이 퇴임하면 미국은 앞으로 유럽 문제를 누구와 논의해야 할지 고민에 빠질 것”이라고 전했다. 16일 미 정치매체 폴리티코는 “메르켈의 부재(不在)로 EU 또한 폭풍우 속에 표류하는 위험한 시기로 접어들었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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