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전광판에는 대회 개막을 알리는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관중의 열띤 함성이나 연호는 없었다. 텅 빈 관중석에는 침묵이 흐르기도 했다. 간간이 박수 소리가 흘러나왔다. 차분하고 진지한 분위기 속에 지구촌 최고의 스포츠 축제가 막을 올렸다.
● 차분하게 막을 올린 첫 무관중 올림픽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1년 연기된 2020 도쿄 올림픽 개회식이 23일 일본 도쿄 신주쿠 올림픽스타디움에서 열렸다. 코로나19 여파로 이날 행사는 무관중으로 진행됐다. 6만8000석 규모의 스타디움에는 각국 선수단, 귀빈, 미디어 관계자 등 950여 명만 참석했다.
귀빈석에는 외국 정상으로 유일하게 일본을 찾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부인 질 여사만이 자리를 채웠다. 마크롱 대통령은 개회식에 참석한 유일한 외국 정상으로, 2024년 열리는 파리 올림픽을 위해 도쿄를 찾았다.
개회식은 총 9개 소주제로 ‘감동으로 하나 되다(United by Emotion)’라는 슬로건을 표현했다. 나루히토 일왕과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 입장한 가운데 일본 국기 게양과 일본 국가 연주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공연이 진행됐다.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는 일본의 톱 가수인 미샤가 불렀다. 1824대의 드론 불빛이 허공에서 도쿄 올림픽 엠블럼과 지구를 형상화하기도 했다.
이날 개회식 공연들은 과거 올림픽과 같은 흥겨움보다는 코로나19 상황에 따른 전 세계적 위기감을 보여주듯 ‘하나’ ‘지속’ ‘유산’ 등을 주제로 차분하게 진행됐다. 그동안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올림픽 기간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시간도 가졌다. 관중과 호흡을 기대하기 힘들어 리허설을 보는 듯한 장면도 많았다. 황승경 공연평론가는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고통 받는 시기, 공존이라는 가치를 예술적 상상력으로 풀어내기 위해 애쓴 흔적이 엿보인다”고 말했다.
●성화 최종 점화자는 오사카 나오미
선수단 입장 때는 근대 올림픽이 처음으로 열린 그리스가 가장 먼저 입장하고 난민대표팀에 이어 일본어 순서와 IOC 기준에 따라 각국 선수단이 입장했다. 코로나19 영향으로 선수단도 제한된 인원만 행진에 나섰다. 29개 종목 232명의 선수가 출전한 한국 선수단은 103번째로 임원 6명과 선수 24명이 나섰다. 남자 기수는 수영의 황선우, 여자는 배구의 김연경이 등장했다. 한국 선수단이 입장하자 IOC 윤리위원장에 재선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이번 대회는 IOC 권고에 따라 처음으로 대부분 참가팀이 남녀 공동 기수를 앞세웠다.
곧이어 바흐 위원장과 하시모토 세이코 도쿄 올림픽조직위원장의 환영사, 나루히토 일왕의 개회 선언이 이어졌다. 나루히토 일왕은 “제32회 근대 올림피아드를 기념하는 도쿄 대회의 개회를 선언합니다”라며 개회 선언을 했다. IOC가 선언 예문에 넣어 놓은 ‘축하’ 대신 ‘기념’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코로나19 확산을 우려하며 올림픽 개최에 반대하는 국내외 여론을 많다는 사실을 감안해 ‘축하’ 문구를 뺀 것으로 풀이된다.
개회식의 하이라이트로 관심을 모았던 마지막 성화 봉송 및 최종 점화는 일본의 테니스 스타 오사카 나오미가 했다. 여자 테니스 세계랭킹 2위인 오사카는 2018년과 2020년 US오픈, 2019년과 올해 호주오픈 등 메이저 대회 단식에서 4차례 우승을 거머쥔 세계적인 테니스 스타다. 오사카는 아이티 출신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로 다양성, 조화의 가치를 알려주기에 충분했다.
● 성화가 타올랐어도 여전한 반대 여론
스타디움 밖에선 또 다른 분위기가 연출됐다. 올림픽을 반대하는 시위대 목소리가 관중이 없는 개회식장으로 생생하게 전달됐다. 경기장 주변은 많은 시민이 몰려 최대 1km 밖까지 교통통제가 이뤄졌고 인도는 혼잡했다. 스타디움이 가장 잘 보이는 올림픽기념관 앞에는 수백 명이 몰렸다. 잔디밭엔 돗자리를 깔고 앉은 시민도 많았다. 다구치 다케마사 씨는 “어떻게든 세계인들과 함께 즐기고 싶었는데 (코로나19 상황으로) 안타까워 나왔다”고 말했다. 코로나19 확진자가 늘고 있는 도쿄에서 올림픽이 또 다른 도화선이 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커졌다.
이번 개회식은 도쿄의 우려스러운 상황에서 화려하고 웅장한 스케일의 행사와 프로그램을 마련해 보여주기에는 물리적으로, 정서적으로 한계가 명확했다. 영국 매체 ‘가디언’은 이날 도쿄 올림픽을 1920년 스페인 독감이 유행하는 중에 열린 벨기에 안트베르펜 올림픽에 비교하며 “세계적인 대유행 속에 파티를 열고 있다”고 지적했다. BBC는 ‘여태 본 적이 없는(like no other) 개회식’이라는 제목을 달아 보도했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개회식 직전 올림픽스타디움 내부를 둘러본 뒤 “정말 아무것도 없다”며 “(관중이 없어) 보안요원들이 지루한 표정으로 걸어 다니고, 6만 관중이 입장했어야 할 회전문은 꿈쩍도 안 했다”고 전했다.
● 일본 언론 “이례적이고 이상한 올림픽”
개회식을 기점으로 올림픽의 열기가 올라갈지 미지수다. 일본 국민들은 오히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활약 중인 오타니 쇼헤이(27·LA 에인절스)에게 더 관심이 많다. 일본 온라인 뉴스매체 ‘제이캐스트’가 1일부터 20일까지 온라인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오타니의 경기를 보고 싶다고 응답한 사람이 올림픽 시청을 원한다는 응답자보다 두 배 이상으로 많았다.
일본 주요 신문은 23일 올림픽 개막을 놓고 일제히 의견이 나뉘었다. 진보 성향의 아사히신문, 도쿄신문, 마이니치신문 등은 사설을 통해 우려의 목소리를 나타냈다. 반면 요미우리신문, 산케이신문 등 우익 성향 매체들은 대회 개최 필요성을 주장했다. 아사히는 이번 올림픽을 “분열과 불신 속에서 막을 여는, 이례적이고 이상한 올림픽”이라고 했다. 코로나19 시대 첫 올림픽은 복잡한 여운 속에 17일간의 여정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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