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옛날이여”… 형 따라 몰락 기로에 선 CNN 쿠오모 앵커[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8월 10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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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이런 면봉이었어? 아니면 이만한 면봉? 이것도 아니면 이만한 사이즈?”

동생은 점점 더 큰 면봉을 보여줍니다. 나중에는 성인 머리 사이즈만한 초대형 면봉을 가지고 나옵니다. 동생의 장난에 형도 척척 장단을 맞춥니다.

“동생아, 신종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검사는 전혀 힘들지 않아. 작은 면봉을 콧속에 찔러 넣기만 하면 돼. 나처럼 콧구멍이 작은 사람도 문제없더라. 너도 알다시피 나는 쿨한 녀석(cool dude)이잖아.”

CNN 앵커 크리스 쿠오모(왼쪽)가 형 앤드류 쿠오모 뉴욕주지사를 인터뷰하며 대형 면봉으로 장난치는 모습. 쿠오모 주지사는 웃음을 참느라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 CNN
CNN 앵커 크리스 쿠오모(왼쪽)가 형 앤드류 쿠오모 뉴욕주지사를 인터뷰하며 대형 면봉으로 장난치는 모습. 쿠오모 주지사는 웃음을 참느라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 CNN
지난해 5월 CNN 앵커 크리스 쿠오모(50)가 진행하는 뉴스 프로그램 ‘쿠오모 프라임타임’에 형 앤드류 쿠오모 뉴욕주지사(64)가 출연했습니다, 당시 뉴욕의 코로나19 검사율을 높이기 위해 쿠오모 주지사가 솔선수범해 콧속에 면봉을 밀어 넣는 항체검사를 한 것을 두고 인터뷰가 진행됐습니다. 이렇게 형제 사이에 주거니 받거니 인터뷰가 이뤄지는 것은 극히 드문 일입니다. 인터뷰 분위기도 지나치리만큼 자유분방해 미국에서 큰 화제가 됐습니다. 뉴스 인터뷰라기보다 개그 코너에 가깝다는 평이 많았습니다. 일명 ‘쿠오모 형제의 코미디 아워(시간)’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인터뷰를 두고 비판이 적지 않았습니다. 코로나19를 코미디 소재로 삼을 수 있느냐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유명 앵커 동생이 정치인 형을 출연시켜 업적 홍보 기회를 준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비판도 나왔습니다. 그러자 동생 쿠오모 앵커가 발끈하며 반박에 나섰습니다. “지금 미국은 위로와 웃음이 필요하기 때문에 인터뷰를 재미있게 꾸몄다”고 했습니다. 쿠오모 형제의 인기에 워낙 높아 비판론은 흐지부지 사라졌습니다.

그로부터 1년 3개월 후 뉴욕 검찰의 수사 결과 쿠오모 주지사의 성추행 의혹이 사실로 밝혀지면서 쿠오모 형제의 인기는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쿠오모 주지사는 거센 사퇴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조 바이든 대통령까지 사퇴를 촉구합니다. 동생 쿠오모 앵커의 신세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저녁 9시 황금시간대에 방송되는 ‘쿠오모 프라임타임’ 앵커 직에서 물러나라는 요구가 빗발칩니다. 그의 고용주인 CNN도 비판을 면치 못하는 상항입니다.

CNN에서 주중 오후 9시(동부시간 기준)에 방송되는 ‘쿠오모 프라임타임.’ 진행자 크리스 쿠오모는 ABC방송 앵커 출신으로 2013년 CNN으로 옮겼다. 2018년부터 ‘쿠오모 프라임타임’을 맡고 있다. CNN
CNN에서 주중 오후 9시(동부시간 기준)에 방송되는 ‘쿠오모 프라임타임.’ 진행자 크리스 쿠오모는 ABC방송 앵커 출신으로 2013년 CNN으로 옮겼다. 2018년부터 ‘쿠오모 프라임타임’을 맡고 있다. CNN
일각에서 쿠오모 앵커에 대한 동정론도 나옵니다. “연좌제도 아닌데 형의 잘못에 동생까지 연대책임을 지고 사퇴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죠. 하지만 쿠오모 앵커가 형의 성추행 대책 모의에 가담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동정론은 설 곳이 없어졌습니다. 저널리스트로서의 기본적인 자질조차 의심받고 있습니다.


수사 결과에 따르면 쿠오모 앵커는 성추행 의혹 무마 대책회의에 수차례 참가하고 언론 발표문도 직접 작성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쿠오모 앵커가 썼다는 발표문은 ”나(쿠오모 주지사)는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장난 치고 농담을 주고받는 것을 즐긴다. 나의 의도는 분위기를 돋우려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행동에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던 것 같다“는 내용입니다.

‘뉴욕의 전설적인 주지사’로 불리는 고(故) 마리오 쿠오모 주지사의 아들인 앤드류(오른쪽)와 크리스(왼쪽) 형제. 가운데는 형제의 어머니인 마틸다 여사.   뉴욕포스트
‘뉴욕의 전설적인 주지사’로 불리는 고(故) 마리오 쿠오모 주지사의 아들인 앤드류(오른쪽)와 크리스(왼쪽) 형제. 가운데는 형제의 어머니인 마틸다 여사. 뉴욕포스트
언론감시단체인 포인터 인스티튜트는 ”형의 행동 때문에 쿠오모 앵커를 탓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자신의 행동 때문에 탓하는 것이다“고 비판했습니다. 쿠오모 앵커가 앞으로 공인들의 성추행 사건을 보도할 때 공정성을 유지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죠. MSNBC의 유명 칼럼니스트는 ”언론인이 정치인에게 조언을 해주고 발표문을 작성해준다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고 비윤리적인 행동“이라며 ”쿠오모 앵커는 앞으로 정치 분야 취재를 금지시키거나 사퇴해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쏟아지는 비난에 쿠오모 앵커는 침묵 전략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형의 성추행 사건 조사 결과는 핫뉴스이므로 집중적으로 다루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쿠오모 프라임타임‘에서는 일체 언급이 없었습니다.

관련 뉴스가 실종되면서 프로그램 연결 때 어색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앞뒤 시간대 앵커들이 서로 교대할 때 온에어(방송 중) 상황에서 농담이나 대화를 주고받습니다. ’쿠오모 프라임타임‘의 다음 시간대인 ’돈 레몬 투나잇‘의 앵커 레몬은 쿠오모 앵커와 웃으며 잡담을 나눈 뒤 프로그램 시작과 함께 ”오늘의 톱뉴스는 쿠오모 주지사 성추행 사건 조사 결과입니다“라며 정색 모드로 돌변합니다.

뉴스 진행 준비를 하고 있는 크리스 쿠오모 앵커. 할리우드리포터즈
뉴스 진행 준비를 하고 있는 크리스 쿠오모 앵커. 할리우드리포터즈
CNN의 소극적인 대응도 논란거리입니다. 쿠오모 앵커가 형에게 도움을 준 것이 처음 알려진 것은 5월 워싱턴포스트(WP) 보도를 통해서입니다. WP에 따르면 쿠오모 앵커는 형에게 사퇴 압력을 거부하고 미국 사회에 번지고 있는 ’취소 문화‘(자신에게 동조하지 않는 상대편 세력을 삭제해버리는 문화 현상)의 희생양이라는 이유로 성추행 사실을 부인하도록 충고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WP 보도 이후 쿠오모 앵커의 자질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을 때 CNN은 ”앞으로 형 쿠오모 주지사에 대한 취재를 금지시키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게 무슨 징계냐“는 비판이 일었습니다. 이번 수사 결과 발표 후에도 CNN은 쿠오모 앵커에 대한 공개 질책 수준의 징계 절차를 밟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이미 WP 보도 때 우리는 필요한 조치를 취했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CNN의 이중 잣대“라는 비판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성추문이나 경쟁사인 폭스뉴스 경영진의 성추행 사건 때는 상세 보도와 비판의 칼날을 들이댔던 전력이 있으니까요. CNN 내부에서도 불만이 커지고 있다고 합니다. 쿠오모가 스타 앵커가 아닌 일반 직원이었다면 이렇게 덮고 지나갈 수 있겠느냐는 거죠. 지난해에는 띄워주기 바빴던 쿠오모 형제 때문에 이렇게 골머리를 썩게 될 줄은 CNN은 당연히 몰랐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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