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 “카불이 함락돼도 난 집으로”… 소문난 윌밍턴 ‘집돌이’[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8월 17일 14시 00분


코멘트
“카불 미대사관은 지금 당장 철수합니까?”

“탈레반이 이렇게 빨리 진격할 줄 예상하지 못했습니까?”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영영 잃은 겁니까?”

바이든 대통령이 상원의원 시절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레이반 선글라스를 끼고 델라웨어 주 윌밍턴 고향 집으로 가는 암트랙 열차 안에서 업무를 보는 모습. 비즈니스인사이더
바이든 대통령이 상원의원 시절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레이반 선글라스를 끼고 델라웨어 주 윌밍턴 고향 집으로 가는 암트랙 열차 안에서 업무를 보는 모습. 비즈니스인사이더

12일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의 연설이 끝나자마자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습니다. 아프간 수도 카불 함락이 초읽기에 들어간 날입니다. 그러나 “다음 일정이 있다”며 질문을 받지 않고 급히 마스크를 쓰고 외출 준비를 하는 대통령. 그가 향한 곳은 델라웨어 주 윌밍턴에 있는 자신의 집이었습니다.


당초 이날 연설의 주제는 제약사들의 약값 인하였습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아프간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한가한 주제였지만 기자들은 대통령의 연설이 이어지는 동안 참을성 있게 기다렸습니다. 연설이 끝나면 아프간에 대한 질문을 하려는 것이었죠. 하지만 기다린 보람도 없이 대통령이 준비해온 약값 원고만 읽고 자리를 뜨자 기자들로부터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또 윌밍턴?”

미국이 지난 20년 동안 전쟁을 벌여온 아프간이 인권 유린으로 악명이 높은 탈레반에 의해 점령되는 위기에 처했는데도 백악관에서 상황을 주시하기보다 고향 집을 찾은 대통령을 두고 불만이 터져 나옵니다. 윌밍턴에 꿀을 발라놨는지 시간만 나면 그곳을 향합니다. 이날도 윌밍턴에서 백악관으로 컴백한지 이틀 만에 기자회견 후 또다시 윌밍턴에 갔습니다. 기자들은 물론 백악관 직원들까지 자주 집을 비우는 대통령을 두고 수군거립니다. 백악관 조리사들은 취임 후 8개월이 지났지만 거의 ‘집밥’을 먹지 않는 대통령의 식성을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CNN 조사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은 1월 취임 후 8월 둘째 주까지 29차례의 주말 중 65%에 해당하는 19번을 윌밍턴에서 보냈습니다. 목요일이나 금요일 윌밍턴에 가서 월요일에 다시 워싱턴으로 돌아오는 일정이 대부분입니다. 윌밍턴에서 지낸 날짜 수가 백악관에서 보낸 날보다 많습니다. 취임 후 지금 시점까지 백악관을 비운 날이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많습니다.

워싱턴과 윌밍턴은 비행기로 30분 정도 걸리는 가까운 거리다. 바이든 대통령은 두 곳을 이동할 때 전용 비행기 에어포스원보다 
기동성이 좋은 전용 헬기 머린원을 자주 이용한다. 최근 윌밍턴 집에 가기 위해 백악관 인근 포트 맥내어 기지에서 머린원에 오르는 
모습. 데일리메일
워싱턴과 윌밍턴은 비행기로 30분 정도 걸리는 가까운 거리다. 바이든 대통령은 두 곳을 이동할 때 전용 비행기 에어포스원보다 기동성이 좋은 전용 헬기 머린원을 자주 이용한다. 최근 윌밍턴 집에 가기 위해 백악관 인근 포트 맥내어 기지에서 머린원에 오르는 모습. 데일리메일

2월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후 첫 타운홀 미팅에서 백악관 생활을 ‘도금새장(gilded cage)’에 비유했습니다. 화려한 겉모습과는 달리 갇혀있는 기분이라는 겁니다. 취임 1개월 밖에 안 됐는데 벌써 답답함을 토로한다는 것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8년간 부통령을 지내면서 수없이 드나들었으니 백악관 생활에 꽤 익숙할 텐데 말이죠.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은 “백악관을 잘 모른다”고 합니다. 부통령 시절 방문했을 때도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웨스트윙의 일부 공간을 제외하고는 내부를 돌아다닌 적도 없고 백악관이 어떻게 운영되는지에 관심도 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각에서는 백악관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바이든 대통령의 이런 성격을 두고 부통령 시절 몸에 밴 ‘보스 존중 신드롬’이라고 분석합니다. “백악관은 보스가 있는 곳이기 때문에 내가 침범할 수 없다”는 심리가 확고하다는 것이죠. 반면 버락 오바마,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권력 2인자 자리를 거치지 않고 최고의 위치에 올랐기 때문에 오히려 적응이 빨랐다는 것이죠.

대통령의 개인사로 설명하려는 전문가들도 있습니다. 1972년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첫 번째 부인과 딸이 윌밍턴 교회 뒤뜰에 묻혀 있습니다. 지금도 이 교회에서 주말 예배를 보고 묘지를 찾습니다. 당시 엄마를 잃은 두 아들을 돌보기 위해 상원의원이던 그는 워싱턴에서 살기보다 왕복 4시간이 걸리는 윌밍턴까지 매일 열차로 오가는 고된 일정을 택했습니다. 열차와 쌓은 인연 덕분에 ‘암트랙(전미여객철도공사) 조’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죠.

급박하게 돌아가는 아프가니스탄 상황 중에도 윌밍턴 고향 집 인근에서 부인 질 여사와 자전거를 타며 휴가를 즐기는 바이든 대통령. 데일리메일
급박하게 돌아가는 아프가니스탄 상황 중에도 윌밍턴 고향 집 인근에서 부인 질 여사와 자전거를 타며 휴가를 즐기는 바이든 대통령. 데일리메일

대통령이 된 지금은 열차로 이동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용 헬기 머린원이나 전용 비행기 에어포스원을 이용하면 됩니다. 하지만 대통령은 한번 움직일 때마다 큰 비용이 들어갑니다. 수십 명의 수행 인력을 대동하기 때문입니다. 잦은 고향 출타로 인한 연료비와 경호비용 등은 모두 국민 세금에서 충당된다는 점이 공화당에게 좋은 공격 포인트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물론 고향을 자주 찾은 것은 바이든 대통령뿐만이 아닙니다. 역대 대통령들은 좋게 말하면 “정국 구상,” 실상은 휴식을 취할 목적으로 자주 고향에 갔습니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텍사스 크로포드 목장,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은 캘리포니아 산타바버라 목장을 즐겨 찾았습니다. 고향은 아니지만 재임 중 매사추세츠 마서스비니어드 섬을 즐겨 찾던 오바마 전 대통령은 퇴임 후 이곳에 집까지 장만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의 빈번한 윌밍턴행(行)도 마찬가지로 격무에 시달리는 일정에서 벗어나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한 목적일 것입니다. 한번은 백악관 언론 브리핑에서 기자가 “대통령은 왜 그렇게 델라웨어에 자주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젠 사키 대변인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그의 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자를 향해) 당신도 집에 가고 싶죠? 대통령도 마찬가집니다. 똑같은 인간이니까요.”

바이든 대통령이 윌밍턴에 가서 하는 일을 보면 확실히 인간적입니다. 윌밍턴 지역에 집 뿐만 아니라 별장도 갖고 있는 그는 부인 질 여사와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아이스크림을 사먹는 장면이 자주 카메라에 잡힙니다. 가장 행복한 순간을 “목욕가운 차림으로 부엌 식탁에서 모닝커피를 마실 때”라고 합니다. 1996년 지어진 윌밍턴 자택은 바이든 대통령이 문손잡이 디자인까지 직접 결정했을 정도로 애착이 큽니다. 자식에 손자까지 모두 이 집에 모여 일요일 저녁식사를 함께 하는 것은 바이든가(家) 전통이라고 하죠.

바이든 대통령이 백악관 앞뜰에서 손자들과 통화하는 모습. 손자들에게 일주일에 서너 차례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 할아버지로 알려졌다. CNN
바이든 대통령이 백악관 앞뜰에서 손자들과 통화하는 모습. 손자들에게 일주일에 서너 차례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 할아버지로 알려졌다. CNN


그러나 마러라고 리조트나 뉴저지 골프장을 자주 찾은 트럼프 전 대통령의 빈번한 ‘워싱턴 공백’을 대선 유세 때 문제 삼았던 바이든 대통령이 비슷한 전철을 밟는다면 비난을 피하기 힘듭니다. 게다가 최근 바이든 행정부가 ‘제2의 백악관’이라고 불리는 윌밍턴 자택의 출입객 명부를 공개하기를 거부하면서 정보 투명성 문제까지 불거지고 있습니다. 카불 함락에 빗대 “제2의 사이공 모먼트(미국의 치욕적인 베트남 철수작전)”라는 소문이 파다한데 윌밍턴에서 아무리 “아무 문제없다”고 얘기한들 믿을 사람은 없겠죠. 위기 상황일수록 컨트롤센터에서 진두지휘하는 대통령의 모습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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