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간 철군 관련 대국민 연설서
“국익 없는 미군주둔 반복 안해, 철군 후회 없어… 확고히 유지”
‘21세기 새 위협’ 中-러시아 거론… 철군 지지여론 69%→49% ‘뚝’
獨 “아프간 민주국가 건설 실패”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이슬람 무장 반군 탈레반의 손에 넘어간 아프가니스탄 상황이 급속히 악화하는 중에도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 미군 주둔을 계속하는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16일(현지 시간) 천명했다. 앞으로 중국, 러시아 같은 21세기의 위협 대응에 선택과 집중을 하겠다는 외교 정책 방침도 분명히 했다. 국익을 바탕으로 외교 전략의 큰 줄기를 재조정하는 바이든 행정부의 이런 방향성은 향후 한미동맹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에서 가진 대국민 연설에서 “나의 (철군) 결정을 후회하지 않으며 이를 확고히 유지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미국은 이제 과거가 아닌 21세기 새 위협과 전 세계 다른 지역의 대테러 업무 등에 집중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특히 중국과 러시아를 거론하며 “우리의 진짜 전략적 경쟁자인 중국과 러시아는 우리가 아프간에 자금과 자원, 관심을 무한정 쏟아붓는 것을 좋아하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올 1월 취임 일성으로 ‘미국이 돌아왔다’고 외치는 등 전임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무너뜨린 동맹 복원에 나서겠다는 뜻을 그동안 수차례 강조해 왔다. 그런 바이든 대통령이 이번 연설을 통해 ‘국익에 기반한 동맹’을 일종의 대외 정책 가이드라인으로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행동에 나서기 전 미국에 도움이 되는 동맹인지, 미국이 위험과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지켜줄 가치가 있는 동맹인지를 따져보겠다는 것이다.
미국은 아프간 철군으로 빚어진 수도 카불 등 현지의 극심한 혼란으로 국내외의 거센 후폭풍과 함께 동맹들의 비판에 직면해 있다. 특히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속해 있는 유럽의 주요 동맹국들은 미국이 충분한 협의 없이 철군을 밀어붙였다는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16일 “우리는 아프간 내 민주국가 건설에 실패했다”며 “철군 결정은 민주주의와 자유를 믿은 많은 이들, 특히 여성들에게 쓰라린 사건”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은 이런 동맹들의 불만까지 감수하며 철군을 밀어붙였다.
아프간 철군에 대한 미국 내 여론은 나빠졌다. 여론조사업체 모닝컨설트와 정치전문 매체 폴리티코가 13∼16일 유권자 199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49%가 철군을 지지했다. 올해 4월 같은 조사 때의 69%에서 20%포인트나 줄었다. 철군 반대는 37%로 4월의 16%보다 두 배 이상으로 높았다.
바이든, 동맹에 ‘책임 공유’ 강조… 獨메르켈은 “쓰라린 결정” 비판
조 바이든 행정부는 중동의 안보 문제에서 사실상 손을 떼고 외교안보의 초점을 인도태평양 지역으로 옮기는 외교 전략을 추진해 왔다. 특히 전방위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 견제에 집중하고 있다. 부족과 종교 갈등으로 내전 가능성이 상존하는 중동 지역에 발목이 잡히면 전선(戰線)이 분산될 수 있다.
○ 중국에 화력 집중, 국내 지지층 의식 해석도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 직후부터 역설해 온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저버리고 아프가니스탄 여성의 인권을 외면한다는 비난 속에서도 가차 없이 철군을 강행한 것은 이런 밑그림에 따른 결정으로 볼 수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출범 직후인 2월 중동에서 활동하던 니미츠 항공모함 전단을 인도태평양 지역으로 이동시켰고, 아프간 철군뿐 아니라 이라크에서도 주둔 미군의 규모를 최소 수준으로 감축하는 계획을 잇달아 발표했다.
동시에 인도태평양 지역에서는 사실상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의 ‘쿼드’(Quad·미국 일본 호주 인도의 4자 협의체)를 강화하고 인권을 앞세우며 제재 및 경제 규제 등으로 중국 압박 수위를 높여 왔다. 중동에서 발을 빼려는 미국의 시도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부터 지속됐으나 정치권의 강한 반발과 우려 등 때문에 정책 추진에 어려움을 겪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2014년 12월 아프간 전쟁의 종식을 공식 선언하며 주둔 미군 규모를 대폭 줄였으나 중동 정세가 불안정해지자 테러 대응 명목으로 다시 미군을 추가 파병해야 했다. ‘신고립주의’를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도 아프간 철군을 밀어붙였고, 당시 시한은 바이든 행정부가 설정했던 시점(8월 31일)보다 더 빠른 5월 1일이었다.
○ 나토 등 비판에도 ‘동맹의 책임 공유’ 강조
아프간 철군 결정이 외교안보 전략 외에 국내의 정치적 요인을 감안한 게 아니냐는 해석도 있다. 바이든 행정부가 공화당과의 결전이 벌어질 내년 중간선거를 앞두고 철군을 지지하는 국내 지지층을 의식했다는 것이다. 민주당 지지층 사이에서는 전통적으로 반전(反戰) 기류가 강한 게 사실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철군으로 빚어진 아프간 내 대혼란으로 국제사회의 거센 비판에 직면해 있다. 독일 차기 총리가 유력시되는 아르민 라셰트 기민당 대표는 탈레반의 아프간 장악에 대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건립 이후 겪은 가장 큰 재앙”이라고 했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은 “우리가 (아프간에서) 본 비극은 군과 시민 리더십의 붕괴”라고 했다. 그러나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나의 (철군) 결정이 비판받을 것을 알지만 이 결정을 다른 대통령에게 넘기느니 차라리 그 비판을 모두 감내하겠다”며 “(철군 과정이) 어렵고 엉망이고 불완전하지만 대통령으로서 나의 철군 공약을 지켰다”고 말했다. 나토 등 동맹의 비판에도 철군 결정을 뒤집을 생각은 없다는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아프간에서 미국의 임무는 국가 재건이나 반군 진압, 중앙집권적 민주주의 건설이 아닌 테러 대응이고 우리는 임무에 성공했다”고 했다. 9·11테러 주범인 테러단체 알카에다를 진압했고, 그 지도자 오사마 빈라덴을 제거한 게 벌써 10년 전이라는 것이다. “아프간 군대가 스스로를 위해 싸울 생각이 없는데 그 나라의 내전을 막겠다며 우리의 딸과 아들들을 전장으로 내보내는 일을 얼마나 더 해야 하는 것이냐”고 반문한 그는 “(그렇게 해 왔던)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미국의 국익이 아니고 미국인이 원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최강 아산정책연구원 부원장은 “미국이 스스로 지킬 의지가 없는 곳에서는 돈과 인력을 들여 싸우지 않겠다고 밝힌 것은 동맹에도 ‘책임 공유’를 강조하는 바이든 대통령의 기본 가치관이 드러난 것”이라고 분석했다. 바이든 정부가 한국에 동맹 역할을 강조하며 중국 견제 전선 동참을 압박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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