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한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이 미국 영국 등 서방국가들에게 협력한 인물들에 대한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색출 작업에 나선 것으로 드러났다. 불과 이틀 전인 17일 “이전 정부 혹은 외국을 위해 일했던 사람들에게 복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것과 정반대의 행동이다. 탈레반의 잔혹성이 이전 그대로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19일(현지 시간) BBC방송 등은 유엔에 위험 지역 정보 등을 제공하는 노르웨이 국제분석센터(RHIPTO)가 작성한 유엔 내부 기밀 문건을 인용해 이 같이 보도했다. 문건에 따르면 탈레반은 수도 카불 등 아프간 주요 도시를 점령하기 전부터 사전조사를 통해 해당 리스트를 작성했다. 이후 점령이 이뤄지자 현재 수도 카불 등에서 이들을 집집마다 찾아가 리스트에 적힌 인물들의 색출에 나선 상태다. 특히 탈레반은 자수하지 않으면 “가족을 살해하거나 체포할 것”이라며 시민들을 협박하고 있다고 문건은 전했다.
주택가 뿐 아니라, 카불공항으로 가는 도로를 비롯해 잘랄라바드 헤라트 등 주요 도시에 설치된 검문소에서도 유사한 검문이 이뤄지고 있다고 AFP통신은 전했다. 서방에게 협조한 인물 뿐 아니라 이전 정부에서 경찰, 군대, 수사·정보기관에 일했던 종사자들도 함께 색출 중이다. 탈레반은 정보원들을 추가로 모집해 해당 리스트를 늘려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엔 문건을 담당한 RHIPTO 소속 크리스티안 넬레만 박사는 BBC에 “자수하지 않을 경우 탈레반은 가족들을 대신 체포해 심문하고 처벌할 것”이라며 “탈레반 블랙리스트에 오른 인물들이 대량 처형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위험한 상태”라고 전했다.
언론인들도 위협을 받고 있다. 탈레반이 서구 언론에서 일한 아프간인 기자를 잡기 위해 자택에 들이닥치고 있다. 이로 인해 독일 공영 도이체벨레와 일했던 아프간인 기자의 가족 1명이 사살되고, 1명은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고 해당 언론사는 전했다.
일반 시민에 대한 통제도 강화되고 있다. 아프간 카마통신에 따르면 탈레반은 19일 긴급 상황을 제외하고 오후 9시 이후 외출을 금지한다는 통금령을 발표했다. 탈레반 조직원들은 카불 시내에서 시민들을 ‘도둑’으로 몰아 폭행을 하거나 체포하는 일까지 발생하고 있다. 당초 약속과 달리 ‘공포 통치’가 시행되면서 카불 시내 거리 풍경도 달라졌다. 시내에선 청바지를 입은 청소년들이 사라졌고, 식당에선 호객을 위해 틀어놓던 음악도 자취를 감췄다. TV 채널에서도 음악 등 인기프로그램 방송이 멈췄다.
BBC는 “탈레반은 ‘복수는 없을 것’이라며 아프간 시민들을 안심시키려 했지만, 탈레반은 1990년대 이후 거의 변하지 않았다”고 평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도 앞서 이날 ABC방송 인터뷰에서 “탈레반이 변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그들이 떠나려는 미국인들에게 안전한 통로를 제공해줄 지도 확신할 수 없다”고 말했다.
‘외국인이나 아프간을 떠나려는 현지인의 철수를 지원하겠다’는 탈레반의 약속도 지켜지지 않을 가능성이 커지면서 미국에는 비상이 걸렸다. 현재 아프간에서 탈출이 필요한 미국 시민권자는 1만~1만5000명에 이르고 미국인들에게 협력해 온 아프간인들 역시 7만~8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하지만 하루 2000명 안팎을 대피시키는 현재의 속도라면 당초 미국이 약속한 이달 31일까지 대피를 원하는 모든 미국인과 아프간인을 탈출시키는 게 어려울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카불 주재 미 대사관 직원 23명이 지난달 13일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에게 카불 함락이 예상보다 빨리 일어날 수 있으니 미리 철수를 단행해야 한다는 보고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기밀 내부망을 통해 전달된 이 보고에는 통역 등으로 미국에 협조해 온 아프간인들에 대한 정보를 미리 파악하고 이달 1일부터는 비행기를 이용한 대피를 시작해야 한다는 권고가 담겼다. 바이든 행정부는 지금까지 탈레반의 빠른 아프간 장악을 예상하지 못 했다는 입장을 보여 왔다. 하지만 이번 기밀문서 내용이 공개됨에 따라 아프간 사태를 사전에 막지 못한 것을 두고 정부 부처들 간에 책임 공방이 가열될 가능성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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