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에게 데드라인(마감시간)은 생명과도 같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데드라인은 지켜야 한다”는 교육을 기자 초년병 시절부터 철저히 받습니다. 기자가 아니더라도 사회인이라면 데드라인의 압박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데드라인’이라는 단어의 유래는 1860년대 미국 남북전쟁 때입니다. 조지아 주 앤더슨빌 전쟁터에서 북군들을 포로로 잡아 감옥에 넣었던 남군은 탈출을 막기 위해 감옥 장벽 안쪽으로 길고 깊은 웅덩이를 파놓았습니다. 탈옥하는 병사들이 벽에 도달하지 못하고 웅덩이에 처박혀 죽도록 말이죠. 데드라인은 이렇게 ‘죽는 선’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 죽을 듯한 각오로 데드라인을 지키려는 사람이 또 있습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입니다. 바이든 대통령이 설정한 아프가니스탄 철군 데드라인은 8월 31일.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미국의 허를 찌르는 탈레반의 신속한 아프간 점령에서부터 무장조직 이슬람국가 아프간 지부(IS-K)의 카불공항 자폭 테러와 미국의 보복 공격까지 이 데드라인을 지키는 과정에서 혼란에 혼란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바이든 대통령은 “데드라인은 꼭 지킨다”는 입장입니다. “이렇게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데드라인을 지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라는 비판이 쏟아지지만 바이든 대통령은 ‘마이 웨이’를 고수합니다.
취임 후 8개월 동안 통치 스타일을 보면 바이든 대통령은 데드라인을 매우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데드라인 대통령’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습니다. 데드라인을 딱 못박아놓고 “이 때까지 성과를 내겠다”며 정책 드라이브를 거는 사례가 자주 눈에 띕니다. 데드라인 설정은 바이든 대통령 같은 임기 초 리더들에게 유용한 전략입니다. 정책 담당자들의 사기를 고취하고 국민들에게 “대통령이 열심히 일하고 있구나” 하는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습니다.
최근 2개월 동안 바이든 대통령에게 2개의 중요한 데드라인이 걸려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7월 4일 독립기념일까지 전 국민의 70% 1회 이상 백신 접종’ 목표였습니다. 대대적인 홍보 캠페인을 펼쳤지만 이 데드라인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이 두 번째 데드라인인 8월말 아프간 철군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앞선 접종 데드라인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한 것이라는 지적이 많습니다.
주목을 받았던 ‘트윈 데드라인’이 실패 내지는 혼란 양상을 보이면서 바이든 대통령의 지지율 급락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연타석 홈런을 맞은 투수 꼴”이라고 비유하는 언론도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데드라인 성공률이 바닥권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취임 초에 설정했던 다른 데드라인들은 술술 잘 풀렸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목표 달성 능력을 과신하고 방심했던 측면이 있습니다.
당선인 시절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후 100일까지 1억 회 백신 접종” 목표를 발표했습니다. 이 목표를 취임 후 60일도 안 돼 조기 달성한 뒤 “취임 후 100일까지 2억 회 접종”으로 목표를 상향 조정했습니다. 이 목표도 취임 후 92일이 지난 시점에 거뜬하게 달성했습니다. 당시 바이든 행정부는 자축 팡파르 분위기였죠.
하지만 이 때부터 벌써 ‘데드라인 회의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접종률 조기 달성을 데드라인을 설정한 덕분이라고 보기 힘들기 때문이죠. 팬데믹 초기에 너도나도 백신을 원하는 상황에서 정해진 기한 내에 접종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데드라인을 대국민 캠페인에 이용하는 전시용 행정”이라는 비판이 나옵니다.
데드라인 이론은 마케팅 분야에서 자주 쓰입니다. 데드라인이 효과적으로 작용하려면 돌발변수 예측과 360도 시나리오 수립이 전제 조건이 돼야 합니다. 전문가들은 “아프간 철군 데드라인 전략은 이런 조건들을 갖추지 못했다”고 지적합니다. 탈레반의 군사 능력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허술한 정보수집망, 수송기 탈출 과정에서 보여준 출구전략 부재, 문제의 핵심을 외적 요인으로 돌리는 정책 담당자들의 이기주의 등을 보면 바이든 행정부의 위기대응 능력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보다 근본적인 비판은 데드라인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바이든 대통령의 통치 방식에 모아집니다. 데드라인은 동기 부여라는 긍정적 측면이 있지만 기한 내 목표 달성이 지상 과제가 되면 균형적인 판단력을 잃고 과도한 속도전에 매몰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데드라인 설정은 정치인 바이든의 오랜 습관입니다. 36년간 상원의원으로 이름을 날린 그는 데드라인을 정해놓고 일하는 방식에 익숙합니다. 목표일까지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반대파와 막후 협상을 벌이는 일에 워낙 능숙해 “스무드 오퍼레이터”로 불립니다. 데드라인이라는 시간적 제약이 협상 타결에 촉진제가 된 사례도 많았습니다. 데드라인 홍보는 유권자들에게 ‘의정 활동을 열심히 하는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는 데도 도움이 됐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은 국회의원과 다른 자리입니다. 최종 결정권자인 대통령이 기한을 못 박으면 정책의 완성도와 실행력을 떨어뜨릴 수도 있습니다. ‘거래의 달인’이라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데드라인을 설정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 건설도 “언제 어느 선까지 완료 하겠다”고 약속한 적이 없습니다. 사업적 본능을 가지고 있던 그는 데드라인 정치의 홍보 효과와 정치적 부담을 저울질한 뒤 어느 쪽이 유리한지 판단을 내린 것이죠.
아프간 철군에 대한 지지 여론은 높지만 성급한 철군에 대한 반대 여론이 큰 상황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데드라인에 집착하는 것을 두고 “아직도 의원인줄 착각하는 듯 하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한 민주당 전략가는 말합니다. “원래 정치인은 데드라인을 지배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바이든 대통령은 데드라인에 의해 지배되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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