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현지 시간) 이집트 수도 카이로의 알리파이 모스크를 찾았다.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왕좌에서 축출된 후 이집트로 도피한 이란 팔레비 왕조의 마지막 왕 무함마드 리자 팔레비(1919∼1980)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친미 성향의 팔레비 왕이 망명지로 이집트를 택한 이유는 이집트 역시 1978년 중동 이슬람 국가 최초로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을 정도로 미국과 우호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팔레비 왕 또한 즉위 초 왕권이 강력했을 때 이집트에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안와르 사다트 당시 이집트 대통령 또한 팔레비 왕과 돈독한 교분을 유지했다.》
당시 이집트 정부는 팔레비 왕이 숨지자 이 모스크 내 작은 방에 관을 안치했다. 직접 본 팔레비 왕의 관은 가로 1m, 세로 2m 남짓한 크기였다. 무덤 옆 이란 국기가 아니었다면 이란 국왕의 무덤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평범했다. 약 2500년간 유지됐지만 혁명으로 단숨에 무너진 페르시아 군주제의 마지막을 잘 보여주는 듯했다.
팔레비 왕의 죽음은 한반도와 이란 관계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친미 성향으로 세속주의를 표방한 그의 집권기에 이란은 북한보다 한국과 훨씬 가까웠다. 하지만 신정일치와 반미를 내세운 혁명정부가 들어선 후 이란은 한국과 멀어지고 북한과 밀착했다.
4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이런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5일 ‘초강경 보수파’ 에브라힘 라이시 신임 이란 대통령이 집권한 후 이란과 북한은 모두 양국 교류를 강화하겠다는 뜻을 드러내고 있다.
‘반미’ 라이시 취임 반기는 北
북한은 6월 라이시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부터 대대적인 축하를 아끼지 않았다. 우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곧바로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이란 관영 IRNA통신 또한 ‘해외 지도자의 대선 축하’란 기사를 통해 김 위원장의 축하를 전했다. 8월에는 김덕훈 총리와 리선권 외무상이 각각 자신의 카운터파트인 모하마드 모호베르 부통령, 호세인 아미르압돌라이안 외교장관에게 취임 축하를 했다.
잘 알려진 대로 라이시 대통령은 1980년대 이란-이라크전쟁 당시 친이라크 성향을 보인 정치범 약 5000명의 사형 집행을 주도하고 2009년 대선 부정선거 의혹에 항의하는 반정부 시위대를 유혈 진압한 혐의 등으로 2019년 미국의 제재 명단에 올랐다. 그는 대선 승리 직후 첫 기자회견에서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을 만날 계획이 없다”고 했고 서방과의 핵합의 복원에 대해서도 부정적 반응을 보여 온 반미파의 선두주자다. 특히 21일 화상으로 참석한 유엔총회 연설에서 이란에 대한 미국의 제재를 ‘전쟁을 위한 메커니즘’이라고 맹비난하며 “제재는 세계 각국에 대한 미국의 새로운 전쟁 방식”이라고 질타했다.
이런 라이시 대통령의 취임 직후 북한 외무성은 웹사이트에 ‘반제 자주를 위한 한 길에서’란 글을 게재했다. 여기에는 1981년 당시 이란 국회의장을 대표로 하는 국회대표단과 김일성 주석의 면담 내용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북한이 다른 나라와의 정상회담이나 수교 기념일이 아닌 국회 대표단 차원의 방문을 기념하기 위한 성명을 내는 건 매우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북한은 이 글에서 당시 김 주석이 “반제 자주를 위한 공동 투쟁 속에 맺어진 조선과 이란의 친선 관계 발전에 깊은 관심을 돌리고 이슬람교 혁명 전취물 수호 투쟁에 지지 성원을 보냈다”고 했다. 또 김 주석이 자신을 ‘이란 인민의 친근한 벗’이라고 했다고 강조했다. 그만큼 북한이 이란과의 관계에 공을 들이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북한과 이란의 군사 교류 또한 계속되고 있다. 이스라엘 민간 연구기관 베사센터는 북한이 중국, 파키스탄 등을 거쳐 이란에 무기를 수출하고 있다고 밝혔다.
北, 이란핵합의 복원가능성 촉각
북한은 이란이 1월 바이든 미 행정부 출범 후 도널드 트럼프 전 미 행정부가 일방적으로 파기했던 핵합의(JCPOA·포괄적공동행동계획) 복원을 위해 미국과 치열한 수싸움을 벌이고 있는 상황 또한 예의 주시하고 있다. 최고 지도자 알리 하메네이와 라이시 대통령 모두 공식석상에서는 입을 모아 ‘반미’를 주창하지만 서방의 오랜 제재,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등으로 더 심각해진 경제난을 타개하려면 어떤 식으로든 핵합의 복원을 추진해야 하는 실정이다. 이란이 처한 상황이 북한에도 상당한 시사점을 줄 수밖에 없다.
이란은 12일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임시 핵사찰을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IAEA의 핵사찰은 이란의 핵개발 상황을 지켜볼 수 있기 때문에 핵합의 복원의 주요 조건으로 꼽힌다.
양측이 이번에 합의한 내용은 IAEA가 이란 핵시설에 설치한 카메라로 영상 녹화를 하되 이 자료를 이란 내에서만 보관하고 해외로 반출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양측은 이후에도 옥신각신 다툼을 벌이고 있다. 27일 루이스 보노 IAEA 주재 미국대사는 IAEA 이사회에 제출한 성명을 통해 “이란이 지체 없이 IAEA에 필요한 접근을 제공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란이 IAEA의 감시장비 사용에 필요한 접근을 거부했으며 라파엘 그로시 IAEA 사무총장을 수도 테헤란으로 초청하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하루 뒤 모하마드 에슬라미 이란 원자력청장은 “미국은 이란에 핵시설 사찰을 요구할 자격이 없다”며 이란 핵시설에 대한 테러 행위를 비난하지 않는 미국이 핵사찰을 거론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받아쳤다. 이란은 지난해 말 유명 핵과학자 모센 파크리자데가 테헤란 근교에서 암살된 것, 지난해와 올해 연이어 중부 나탄즈 핵시설에 대한 의문의 공격이 가해진 것이 모두 이스라엘 소행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이 이스라엘의 이런 행동을 묵인하면서 이란에만 일방적으로 핵사찰을 강요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전문가들은 북한 또한 이런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장지향 아산정책연구원 중동지역센터장은 “이란 강경파는 우라늄 농축 농도를 즉시 핵개발이 가능한 90%까지 끌어올리겠다는 뜻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야 핵합의 복원 협상에서도 최대한 협상력을 높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이란의 다음 차례가 될 수 있는 북한 입장에서는 이란이 미국과 벌이는 수싸움을 낱낱이 연구하고 분석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유달승 한국외국어대 이란어과 교수는 “아프간 철군 등 중동 관여를 줄이고 중국에 집중하겠다는 뜻을 천명한 바이든 행정부 또한 서둘러 핵합의를 복원해야 중국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할 수 있는 만큼 어느 정도 선에서는 이란의 행동을 묵인해줄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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