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100대 총리가 될 집권 자민당 총재로 대표적인 비둘기파 정치인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전 자민당 정무조사회장이 선출된 것은 자민당이 ‘개혁’보다 ‘안정’을 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민당 내 ‘파벌 간부’와 ‘젊은 세대’의 세력 대결에서 결국 파벌이 이겼다. 주요 파벌의 지원을 등에 업은 기시다가 3선 이하 젊은 의원의 지원과 국민적 인기를 앞세운 고노 다로(河野太郞) 행정개혁담당상을 1차와 결선 투표에서 모두 이겼다. 최대 파벌 호소다파를 이끄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 두 번째 파벌인 아소파를 이끄는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의 ‘AA 라인’이 앞으로도 막후 실력자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기시다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중의원 의원을 지낸 정치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정치인을 꿈꾸게 된 계기는 미국 뉴욕에서 겪은 인종차별이었다. 부친 기시다 후미타케(岸田文武·1926∼1992) 씨는 의원이 되기 전 통상산업성(현 경제산업성) 관료로 근무하던 1963년 뉴욕으로 파견됐다. 초등학교 1∼3학년을 뉴욕에서 보낸 기시다는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느끼면서 ‘불합리한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생각했다. 와세다대 법학부를 졸업한 기시다는 은행원 생활을 하다가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물려줬던 지역구를 넘겨받아 1993년 자민당 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아베 전 총리와 노다 세이코(野田聖子) 자민당 간사장 대행 등이 의회 입성 동기다. 2012년 12월 2차 아베 정권 출범 때 외상으로 임명된 기시다는 전후 두 번째로 긴 4년 7개월간 외상을 지냈다. 한국과 2015년 위안부 합의 때 실무를 맡았고, 우익들의 반발을 우려하는 아베 당시 총리를 설득해 최종 합의에 이르게 했다.
기시다는 “메시지에 힘이 없다” “우유부단하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그래서인지 국민들 사이에선 인기가 높지 않다. 하지만 그는 좋은 ‘귀’를 가졌다. 그는 일명 ‘기시다 노트’로도 불리는 메모 수첩을 양복 상의에 항상 넣고 다닌다. 전국 각지의 유권자를 만날 때 듣는 이야기를 그 자리에서 적는다. 10년 이상 하다 보니 노트는 30권을 넘는다.
총리 4명을 배출한 명문 파벌 ‘고치카이(宏池會·의원 수 46명)’의 회장으로 2012년 취임했다. 그 후 일명 ‘기시다파’로 불리고 있다. 관용, 인내, 평화, 경제 중시 등 키워드를 내세우는 고치카이는 전통적으로 한국, 중국 등 주변국 외교를 중시해 왔다. 재임 중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국에 사죄를 표명한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전 총리도 고치카이 출신이다.
기미야 다다시(木宮正史) 도쿄대 종합문화연구과 교수는 “기시다의 정책을 보면 기존 아베-스가 정권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평가했다. 실제 아베 전 총리가 강하게 밀어붙인 ‘적기지 공격능력 보유’에 대해 기시다는 “선택지 중 하나”라며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아베 전 총리가 필생의 과업으로 여겼던 평화헌법 개정에 대해 “총재 임기 안에 개정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아베 전 총리의 아킬레스건인 국유지 헐값 매입 논란을 부른 모리토모(森友) 사학재단 의혹에 대해선 재조사할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아베-스가 정책 계승이 기시다에게 칼날이 돼 돌아올 수 있다. 스가 내각 지지율이 위험 수치인 20%대까지 떨어졌는데, 그런 스가 내각과 차이를 드러내지 않으면 국민 신뢰를 얻기 힘들다. 기미야 교수는 “(11월로 예상되는) 중의원 선거에서 ‘선거의 얼굴’로 기시다는 약하고, 유권자도 ‘역시 자민당은 당내 역학이 우선시된다’고 낙담할 수 있어 승리하기 힘들 것”이라며 “그 경우 기시다 정권은 잠정 정권으로 단명을 피하지 못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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