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자민당 ‘62년 집권’… 국민들은 정치 무관심
총리 7명이 명문가 후예
당내 파벌 똘똘 뭉쳐 장기집권
지식인들 한탄-비판 쏟아져
“고노가 1위가 아니라고?”
지난달 29일 일본 집권 자민당의 총재 선거가 치러진 도쿄 미나토구의 그랜드프린스호텔. 대형 화면에 뜬 1차 투표 결과를 본 취재진과 의원 보좌진은 깜짝 놀랐다. 여론 지지가 높은 고노 다로(河野太郞) 당시 행정개혁담당상이 1차 투표에서 당연히 1위를 할 것이란 예상을 깨고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전 외상에게 밀려 2위를 기록했다. 기자들이 휴대전화로 본사 보고를 하느라 현장이 소란스러워졌다.
의원내각제를 택하고 있는 일본은 집권당 대표가 총리로 선출된다. 선거 직전 주요 여론조사에서 일본 국민 2명 중 1명은 고노를 새 총리로 지지했지만 결과는 달랐다. 결국 기시다는 4일 임시국회에서 제100대 총리로 취임했다. 의원 382명, 당원 382명 등 합계 764명이 투표를 한다지만 자민당 내 주요 파벌이 사실상 밀실에서 총리를 결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과정에서 1억2000만 국민의 목소리가 반영될 여지는 거의 없었다.
세계 3위 경제대국에 걸맞지 않은 후진적 정치 체계에 대한 비판도 커지고 있다. 영국 일간 더타임스는 “기시다는 유권자가 아닌 몇백 명의 자민당 의원 덕분에 승리할 수 있었다”며 “중국과 북한 같은 공산주의 국가 외에 자민당은 유일하게 세계에서 긴 시간 동안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고 전했다. 가디언 또한 자민당의 장기 집권으로 일본이 주요 선거에서 세계 민주주의 국가 중 가장 낮은 투표율을 보이고 있다며 “제대로 된 선택지가 없다면 민주주의 또한 의미가 없다”고 했다. 일종의 ‘종교’ 혹은 ‘선거승리 기계’로 여겨지는 자민당의 독주가 새롭고 신선한 인물의 등장을 막고 있다고 비판했다.
○ 고착화된 자민당 장기 집권과 세습 정치
2000년대 들어 모리 요시로(森喜朗)부터 현 기시다까지 일본은 총 10명의 총리를 맞았다. 이 중 자민당 출신이 아닌 사람은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간 나오토(菅直人),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단 3명. 다만 하토야마 총리는 1986년 자민당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고 7년 후 당적을 옮겼다. 이 세 사람의 재임 기간을 합해도 약 3년 3개월에 불과하다. 두 차례 집권을 통해 무려 3188일(약 8년 7개월)간 재임한 최장수 총리 아베 신조(安倍晋三)와 큰 차이를 보인다.
또한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간, 노다 총리를 제외한 총리 7명은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총리, 장관, 의원 등을 지낸 정치 명문가(名門家) 출신이다. 이번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도 후보 4명 중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자민당 정무조사회장을 제외한 기시다 총리, 고노 자민당 홍보본부장, 노다 세이코(野田聖子) 저출산담당상 등 3명이 세습 정치인이었다.
의원도 마찬가지다. 2017년 출범한 현 중의원에서 당시 당선인 중 26%가 세습이었다. 자민당으로 한정하면 이 수치가 40%로 오른다. 자민당의 장기 집권과 일본의 세습 정치 전통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 잘 보여준다. 일본 내에서는 31일 중의원 선거에서도 세습 정치인이 대거 당선될 것으로 보고 있다.
자민당은 1955년 온건 보수 성향의 민주당과 강경 보수 자유당이 ‘보수 대단결’을 주창하며 탄생했다. 이후 현재까지 66년 동안 약 4년(1993년 8월∼1994년 5월, 2009년 9월∼2012년 12월)을 제외하면 집권당 자리를 유지했다.
즉 일본의 정권교체는 집권당이 바뀌는 게 아니라 자민당 총재를 배출하는 파벌의 물갈이에 가깝다. 당내 특정 파벌이 배출한 총리의 지지율이 떨어지거나 선거 성적이 좋지 않으면 다른 파벌의 수장을 새 총리로 앉혀 일당독재 비판을 비켜가는 식이다. ‘당내 정권 교체’란 적당한 타협점을 제시해 변화를 바라는 국민 불만을 무마하는 것이다.
○ 약체 야당, 선거제도 등이 장기 집권 부추겨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62년간 특정 정당이 집권하는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로 우선 수권 정당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제1야당 입헌민주당의 무능이 꼽힌다.
많은 일본인은 하토야마, 간, 노다 등 민주당 소속 총리가 3번 연속 집권했던 당시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약체 국가였다고 보고 있다. 당시 민주당은 고교 수업료 및 고속도로 이용료 무료화, 양육비 지원 등 다양한 복지정책을 시도했지만 재원을 마련하지 못해 소비세를 올렸다. ‘자민당 장기 집권에 질려서 뽑아줬더니 돈부터 뜯어간다’는 조세 저항이 거세졌다.
이 와중에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으로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발생하자 당시 간 나오토 정권은 제대로 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허둥지둥했다. 엔화 가치 상승을 방치해 수출경쟁력이 약화됐고 자주외교를 외치면서 미국과의 충돌도 잦았다.
당시 트라우마가 강하게 남아있는 탓에 많은 일본인은 자민당 소속 주요 정치인의 비리 등이 대대적으로 보도돼도 자민당을 버리고 야당으로 돌아서지 않는다. 요미우리신문이 6일 보도한 정당 지지율을 보면 자민당이 48%, 입헌민주당은 13%에 불과했다. 입헌민주당을 자민당의 대체재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1995년까지 유지됐던 중의원 중선거구제 또한 자민당 장기 집권과 세습 정치를 가능하게 한 요인으로 평가받는다. 일본에는 ‘국회의원에게 3개의 반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지반(地盤·지역구), 가반(포·돈), 간반(看板·가문)을 뜻하며 세 요소의 일본어 발음이 모두 ‘반’으로 끝나 유래했다. ‘가반’은 한국어의 ‘가방’인데 일본 정치계에서는 돈다발을 가득 넣은 가방으로 비유된다.
소선거구제에서는 최다 득표를 한 후보 1명만이 당선되지만 지역별 인구에 따라 3∼5명의 복수 후보가 뽑히는 중선거구제에서는 15∼20% 득표만 해도 당선이 가능했다. 자금력, 인지도 등에서 일반 후보보다 훨씬 앞선 세습 정치인이 절대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다. 1996년 소선거구제가 도입된 후 2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런 전통이 짙게 남아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대부분의 선거가 전자 투·개표가 아닌 유권자가 투표용지에 직접 지지 후보의 이름을 써내는 ‘자필 기술’ 방식으로 치러지는 점도 익숙한 성을 지닌 세습 정치인에게 유리하다. 세습 의원이 자식 이름을 ‘다로’ ‘신지로’ 등 기억하기 쉬운 이름으로 짓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전 부총리의 장남 고노 다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의 차남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郞) 전 환경상 등이 대표적이다.
가네코 마사루(金子勝) 게이오대 명예교수는 세습 정치인끼리 자민당 총재 선거에 나서 총리에 오르는 현실을 두고 마이니치신문에 “19세기 메이지시대의 귀족 사회처럼 명문가가 아니면 (높은 곳에) 오를 수 없다. 북한을 보고 비웃을 수 없을 정도”라고 비판했다.
○ 기시다 내각도 ‘세습 내각’
기시다 내각에서도 세습 정치인의 득세가 두드러진다. 우선 스즈키 슌이치(鈴木俊一) 재무상은 전임 재무상 아소 다로(麻生太郞)의 처남이다. 소셜미디어에는 ‘처남에게 재무상 같은 중책을 물려주는 게 말이 되느냐’ ‘장관직이 친인척 사이에서 오가는 자리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들끓고 있다.
아소는 아베 전 총리가 속한 자민당 최대 파벌 호소다파(96명)에 이은 2위 파벌 아소파(53명)를 이끌고 있다. 아소파는 이번 선거에서 겉으로는 기시다 총리와 고노 전 행정개혁담당상 중 1명에게 자율적으로 투표하기로 했다. 하지만 파벌 수장인 아소가 개혁 성향이 강하고 자신과 사이도 껄끄러운 고노를 배척하고 기시다를 노골적으로 지원했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로 알려져 있다. 이런 아소에게 보답하기 위해 기시다 또한 아소의 처남을 재무상에 발탁했다는 말이 나온다. 스즈키 재무상 또한 세습 정치인이다. 그의 부친이자 아소의 장인은 1980년대 초 총리를 지낸 스즈키 젠코(鈴木善幸·1911∼2004)다.
기시 노부오(岸信夫) 방위상은 아베 전 총리의 친동생이다. 어렸을 때 외가로 양자를 가서 형과 성이 다르지만 전후 일본 총리 중 가장 극우 성향이 강하다고 평가받는 형의 노선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가네코 겐지로(金子原二郞) 농림수산상의 부친 역시 과거 농림수산상을 지낸 중의원 의원 가네코 이와조(金子岩三·1907∼1986)다. 부자(父子)가 같은 자리 장관을 지내는 것 또한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기시다 총리 또한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넘겨준 히로시마 지역구를 물려받은 3대 세습 정치인이다. 아들만 셋인 그 또한 지역구를 아들에게 물려줄 준비를 하고 있다. 장남 쇼타로(翔太郞·30)는 기시다의 비서, 차남 고시로(晃史郞·24)는 비서 직책조차 없이 부친의 일을 도우며 도쿄에 있는 의원 숙소에서 함께 기거했다. 조만간 두 아들이 어떤 형태로든 정계에 입문할 것이라는 예상이 많다.
○ 파벌은 존재하나 분열은 없어
자민당 내 7개 파벌이 합종연횡을 거듭하지만 막판에는 굳건하게 단결하는 모습 또한 자민당의 장기 집권을 가능케 하고 있다. 자민당 파벌은 △파벌 수장이 절대 권력을 행사하며 △소속원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다른 파벌과 동시에 소속되지 않는다. 일종의 ‘정당 속 정당’인 셈이다. 총재 선거 때는 서로 지지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지만 최종적으로는 합의 추대로 새 총리를 결정한다.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자민당에서 분열은 일종의 ‘금기’로 여겨진다”며 오랜 집권 경험을 통해 분열하면 집권할 수 없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진단했다. 특히 짧은 집권에 그친 민주당이 이후에도 오랫동안 당내에서 집권 실패 원인에 대한 책임 공방에만 치중해 국민 신뢰를 잃은 것과 대조적이라고 분석했다.
이주경 부산대 사회과학연구원 연구교수 또한 “국회에서 정당 간 정책 대결이나 논의보다 자민당 내 파벌 간 결정과 합의가 더 중요하게 작용하는 측면이 있다”고 했다. 자민당의 장기 집권이 당 내부에서 합의를 도출하면 국회에서도 곧바로 통과되는 식으로 고착화되다 보니 당의 결정이 정부 정책을 좌우하는 구조가 굳어졌다는 의미다.
세습 정치에 대한 국민 거부감도 낮다. 일본에서는 정치뿐만 아니라 많은 직업이 세습된다. 동네의 조그마한 라면가게, 초밥가게 등도 마찬가지다. ‘자식에게 기득권을 물려준다’는 개념이 아니라 ‘장인정신을 계승한다’는 쪽에 가깝다.
의원내각제를 대통령제로 바꾸자는 여론 또한 거의 감지되지 않는다. 주요 언론 중 ‘헌법을 개정해 총리를 국민이 직접 뽑는 방안’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곳은 2012년 5월 아사히신문이 마지막이다. 당시에도 찬성이 68%로 반대(17%)보다 압도적으로 높았지만 이런 여론이 현실 정치에 반영되지는 못했다.
자민당의 장기 집권이 정치에 대한 사회 전반의 무관심을 부추겨 자민당의 장기 집권이 계속 이어지는 일종의 악순환이 나타난다는 지적도 있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여러 측면에서 자민당은 ‘유권자의 무관심’으로부터 이익을 얻고 있다”고 진단했다. 최고 권력자를 직접 선출하는 것도 아니고, 선거에서는 어차피 자민당이 이길 가능성이 큰 만큼 투표를 하지 않는 국민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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