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공개된 보고서 한 건에 대한 미국 정치인들의 반응입니다. “뭐 이런 거지같은 보고서가 있나” “쓰레기통에 처박아야 한다”는 격한 반응도 나왔습니다.
문제의 보고서는 대법원개혁위원회 연구 결과 보고서 초안. 민주당이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 위원회를 만들도록 압력을 넣어 그 성과물로 보고서가 나왔지만 정작 보고서는 민주당이 원하는 결론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민주당 정치인들이 화가 난 겁니다. 격한 반응을 보인 쪽은 모두 민주당 의원들입니다. 다음달로 다가온 보고서 최종 제출 시한을 앞두고 민주당은 이 계륵 같은 보고서 초안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습니다. 공화당은 민주당의 혼란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총기규제, 낙태, 표현의 자유, 동성결혼 등의 이슈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미국에서는 최종 심판기구인 연방대법원의 이념적 구조가 언제나 관심입니다. 현재는 보수 성향 대법관 6명, 진보 성향 대법관 3명으로 불균형 상태입니다.
이념적 불균형에 대한 민주당 지지자들의 불만이 거세게 일었지만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대선 때 대법원 위상을 고려해 대법원 관련 공약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선 후 수그러들지 않는 진보 진영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4월 대법원개혁위원회 설립을 지시하는 행정명령을 발동했습니다. 때 맞춰 민주당 의원들은 대법관 수를 늘리는 ‘확대 법안(Expansion Proposal)’을 발의했습니다.
개혁위원회는 법대 교수, 전직 정부 관리 등 36명의 법률전문가들로 구성됐습니다. 백악관은 설립 당시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가진 위원들로 이뤄졌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민주당이 압력을 넣어 만든 위원회인 만큼 진보적 색채는 분명했습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 백악관 법률 고위직에 있던 예일대 교수와 뉴욕대 교수가 나란히 공동위원장을 맡았습니다.
‘대법원 개혁’이라는 이름을 내걸었지만 위원회의 주요 활동은 ‘대법관’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대법관 수 확대와 대법관 임기 제한이 핵심 논의 사항이었습니다. 여론의 관심도 두 가지 안건에 쏠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6개월 활동 결과를 담은 위원회 보고서는 두 가지 안건에 대해 어떤 해법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대법관 수를 늘리거나 현재 종신직인 대법관 임기에 변화를 줄 경우 대법원의 정치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특히 민주당은 보고서가 대법관 수 확대를 지지하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이 큽니다. 민주당은 현행 6대 3 체제로는 대법원이 심의하는 논쟁적 사안들마다 족족 패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 아래 대법관을 9명에서 13명으로 늘리는 법안을 상원과 하원에서 동시에 발의해 놓고 보고서가 이론적 뒷받침을 제시할 것이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고서는 강한 톤으로 현행 유지를 제안했습니다. 그나마 대법관 임기 제한은 대법관 수 확대보다 호의적이었지만 이마저도 “헌법의 관련 조항을 바꿔야 하는 부담이 적지 않다”면서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보고서가 나온 뒤 대법관 수 확대 법안을 발의했던 셸든 화이트하우스 민주당 상원의원은 “개혁위원회가 대법원의 뿌리 깊은 문제점들과 정면대결할 것으로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보고서는 실망을 안겨줬다”고 밝혔습니다. 에드워드 마키 등 3명의 민주당 의원은 공동성명서에서 “공화당이 대법관 자리를 훔치고 좌지우지했던 행태를 위원회가 바로잡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보고서는 과녁을 벗어났다”고 했습니다.
민주당은 “대법관 임명 때마다 번번이 공화당이 배신했다”고 비판합니다. 2016년 2월 앤터닌 스칼리아 대법관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 상원 다수당이던 공화당은 여러 이유를 대며 1년여 동안 오바마 대통령이 올린 메릭 갤런드 대법관 지명자에 대한 인준 청문회를 연기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대통령 선거가 열리는 해에 인준 절차를 진행하는 것은 대법원을 대통령의 사유화 도구로 변질시킬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2017년 4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후 그 자리에 닐 고서치 대법관을 임명했습니다. 지난해 8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대선의 해임에도 불구하고 10월 말 공화당 주도로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의 상원 인준을 통과시켰습니다.
페더럴리스트 소사이어티, 사법위기네트워크(JCN) 등은 대법관 임명 때마다 자주 거론되는 보수 성향의 법률가 단체들입니다. 페더럴리스트 소사이어티는 2016년 갤런드 지명자 인준을 연기시키는 데 700만 달러를 지출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지난해 대선 직전에 배럿 대법관 임명을 강행했을 때는 1700만 달러의 로비자금이 동원됐습니다. 로비자금은 주로 청문회 때 쓰이는 자료를 유리하게 작성하고, 인준결정권을 행사하는 의원들을 상대로 일대일 설득을 펼치는 데 사용됩니다. 상당 부분이 베일에 싸인 페더럴리스트 소사이어티에는 클래런스 토머스, 새뮤얼 앨리토, 닐 고서치, 브랫 캐버노 등 4명의 대법관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페더럴리스트 소사이어티의 운영 자금은 대기업, 거물 정치후원자들로부터 나옵니다.
대법원 독립에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온 화이트하우스 의원은 “왜 보고서에는 페더럴 소사이어티, JCN 등의 로비 활동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느냐”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대법원의 정치화를 막기 위해서는 대법관 수와 임기 개혁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보고서의 결론은 이미 정치화가 상당히 진행된 대법원의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죠.
최종심은 대법원이, 위헌법률심사는 헌법재판소가 담당하는 우리나라와 달리 두 가지 권한을 동시에 가진 미국 연방대법원은 막강한 권력 기관입니다. 한국인들도 미국 대법원 구성에 관심을 가질 정도입니다. ‘진보의 아이콘’ 긴즈버그 대법관처럼 높은 대중적 인기를 누린 대법관을 가졌다는 점도 한국인들이 관심을 갖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바이든 대통령이 내건 사법개혁 제1탄 격인 대법원 개혁이 출발부터 삐걱거리는 것을 보니 미래가 불안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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