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사 화이자가 각국 정부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공급 계약을 하면서 계약 국가에 불리한 조건들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문제 발생 시 자사 책임은 피해갈 수 있는 불공정 조항들을 포함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 소비자단체 ‘퍼블릭시티즌’은 화이자가 유럽연합(EU) 및 8개 국가와 맺은 공급계약 내용을 입수해 분석한 결과를 담은 보고서를 최근 공개했다. ‘화이자 파워(Pfizer’s Power)’라고 이름 붙인 이 보고서엔 화이자가 브라질, 칠레, 콜롬비아, 도미니카공화국, 페루 등 중남미 국가 및 영국, 유럽연합(EU) 등과 맺은 계약서 세부 내용이 담겨 있다. 이에 따르면 화이자는 해당 국가가 자사 백신을 제3자로부터 구매하거나 제공받을 수 없게 했고, 백신을 다른 나라로 반출하거나 수출하는 것도 금지했다. 브라질과의 계약서에는 이런 조항을 어길 경우 화이자는 즉시 계약을 파기할 수 있고, 브라질 정부는 이후 지급받지 못한 나머지 백신에 대해서도 대금을 지불하는 것으로 돼 있다.
백신 공급 차질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내용도 있다. 브라질, 콜롬비아 등과의 계약에는 백신 공급 부족 상황이 벌어질 경우 화이자가 배달 일정을 일방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조항이 담겼다. 화이자 백신과 관련한 지식재산권 분쟁이 벌어질 경우 계약을 맺은 정부는 이와 관련한 모든 소송과 조치, 이에 따른 손해와 비용으로부터 화이자를 보호해 주고 책임을 면제해 준다는 조항도 있다.
주권면제(sovereign immunity) 적용을 배제한 것도 화이자의 ‘갑질’로 지적받는 부분이다. 주권면제는 ‘주권국가를 다른 나라 법원이 소송 당사자로 재판할 수 없다’는 국제관습법의 원칙이지만, 브라질과 칠레 등은 화이자와 법적 분쟁 시 이를 포기하기로 했다. 화이자가 백신 대금을 받지 못할 경우 해당 국가의 자산 처분을 요구할 수 있다는 의미다.
화이자는 이런 계약 내용을 비공개로 한다는 약속도 받아냈다. 이에 대해 ‘투명한 국제보건프로그램’의 톰 라이트 매니저는 워싱턴포스트(WP)에 “계약 내용을 공개하지 않는 것은 백신이 언제 도착할지, 구매자들이 어느 정도의 재정적 위험을 떠안아야 하는지를 알 수 없다는 의미”라고 지적했다. 투명한 백신 공급 거래를 위해서는 계약 관련 주요 내용이 공개돼야 한다는 것이다. 샤론 카스티요 화이자 대변인은 “비밀 조항은 양측의 신뢰 구축에 도움을 주고, 협상 과정에서 오가는 기밀 정보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한국 정부 관계자는 “팬데믹 상황에선 처음에 많이 생산하고 배포, 접종한 백신이 우위를 점한다”며 “지금 세계적으로 화이자 백신이 ‘갑’이기 때문에 계약상 불평등은 어쩔 수 없는 면이 있다. (계약 내용은) 백신 공급사와의 비밀유지 협약 때문에 공개할 수 없다”고 했다. 정부가 올해 말까지 계약한 화이자 백신은 총 6600만 회분이고 이달 20일까지 4556만5000회분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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