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 선거전 막이 올랐습니다. “조 바이든이 대통령이 된지 1년밖에 안 됐는데 벌써 다음 대선?”이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지만 멱살 잡고 2024년 대선 분위기를 조성하는 화제의 인물이 있습니다. 크리스 크리스티 전 뉴저지 주지사입니다.
최근 라스베이거스에서 공화당유대인연합(RJC) 연례총회가 열렸습니다. 이 행사에 7명의 공화당 대선 잠재 후보들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 니키 헤일리 전 유엔주재 미국대사, 케빈 맥카시 하원 공화당 원내대표,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 론 드산티스 플로리다 주지사, 크리스티 전 주지사 등 이미 한두 번씩 출마 경력이 있거나 리더십을 인정받은 공화당 정치인들입니다.
연단에 오른 7인의 잠룡은 조금이라도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너도나도 열변을 토했습니다. 크루즈 의원이 내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 승리를 장담하며 “민주당의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을 ‘대걸레 아줌마(회의장 청소부)’로 만들어야 한다”고 하자 폭소가 터졌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입심 좋은 크루즈 의원도, 다른 잠재 후보들도 건드리지 못한 주제가 있었습니다. 공화당의 ‘그 분’으로 통하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입니다.
공화당 후보라면 지난해 대선 패배와 이후 벌어진 의회난입 사태를 유발한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한 입장 정리는 꼭 거쳐야 하는 과정입니다. 하지만 RJC 연단에 선 후보들은 트럼프 전 대통령을 비난하게 되면 아직도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트럼프 지지 유권자들을 적으로 돌린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를 화제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가장 많이 당했던 펜스 전 부통령은 미국과 이스라엘 외교관계 얘기만 잔뜩 하다가 내려갔습니다. 다른 후보들도 트럼프보다 거론하기 편한 주제인 바이든 행정부에게로 비난의 화살을 돌렸습니다.
이런 가운데 크리스티 전 주지사가 단연 존재감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자동차 백미러(rear view mirror) 얘기를 꺼냈습니다. 지금은 워낙 유명해져 ‘백미러 연설’로 통합니다. 그는 “과거를 거론하는 것은 공화당에게 필패다. 2020년 선거를 입에 올리는 모든 순간마다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이제 과거를 보는 백미러에서 눈을 떼라. 앞(미래)을 향하는 윈드쉴드로 눈을 돌려라”고 역설했습니다.
크리스티 전 지사는 백미러라는 단어를 통해 아직도 ‘2020년 대선 사기’ 논리에 집착하는 트럼프 전 대통령을 공격했습니다. 그러면서 “국민은 정치인이 자신들을 위해 싸워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 싸움은 귀를 상하지 않게 하는 방식이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또한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조롱과 비하 어법을 구사하는 트럼프 전 대통령을 타깃으로 삼은 발언이었습니다.
“요즘 보기 드문 명연설”이라는 호평이 뒤따랐습니다. 큰 몸집 때문에 ‘곰’이라는 별명을 가진 크리스티 전 주지사의 “여우같은 민첩한 상황 판단력을 보여준 연설”이라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당연히 트럼프 전 대통령은 열을 받았습니다. 곧바로 발표한 성명에서 “크리스티가 RJC 총회에서 대학살을 당했다. 그가 9%의 처참한 지지율로 뉴저지 주지사에서 물러났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런 사람 얘기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고 조롱했습니다.
크리스티 전 주지사는 이후 여러 연설과 인터뷰를 통해 트럼프에 대한 비난의 칼날을 더욱 날카롭게 세웠습니다. 9% 지지율 조롱에 대해 “내가 재선에 도전했을 때는 60% 이상의 지지율로 당선됐다. 트럼프가 재선에 나섰을 때는 바이든에게 패하지 않았나”라며 맞받아쳤습니다. 2010~2018년 뉴저지 주지사를 지낸 크리스티는 재임 당시 높은 인기를 구가하며 2014년 재선 도전 때 압도적인 지지율로 당선됐지만 2015년 터진 ‘브리지게이트’라는 정치 스캔들로 임기 후반에 고전하다가 한자리수 낮은 지지율로 물러났습니다. 트럼프와 크리스티가 제시한 지지율 수치는 관측 시점이 다를 뿐 모두 맞는 얘기입니다.
다른 잠재 후보들과 달리 트럼프와 맞장 뜨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크리스티 전 주지사에 대해 “잘난 척 한다”는 부정적인 시선도 있습니다. 그의 정치 이력을 보면 기회주의자라는 것입니다. 2016년 공화당 대선 경선 레이스에 참가했던 그는 가장 먼저 백기를 들고 트럼프 지지를 선언했습니다. 트럼프 당선 후 정권 인수위원회 위원장까지 맡으며 밀착 행보를 이어갔습니다. 트럼프의 러닝메이트 하마평에 오르기도 했지만 오래 전 뉴저지 주 법무장관 시절 트럼프 전 대통령의 사위이자 이방카의 남편인 재러드 쿠슈너의 아버지를 기소했던 이력 때문에 결국 트럼프 행정부 이너서클에 들지 못했습니다.
크리스티 전 주지사는 과거의 친(親)트럼프 행보를 인정합니다. “트럼프 지지자들을 줄을 세우면 내가 맨 앞줄에 설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난 대선 패배 후 보여준 트럼프의 반성 없는 태도에 실망해 돌아섰다는 것이 그의 변론입니다. 최근 펼쳐지는 정치 상황도 크리스티 전 주지사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습니다. 트위터라는 ‘입’을 잃어버린 후 트럼프 전 대통령의 영향력은 예전만큼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최근 버지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글렌 영킨 공화당 후보는 트럼프의 지지에 의존하지 않고 당선됐습니다.
아직 공식적으로 대권 도전을 발표하지 않은 크리스티 전 주지사는 “내년 중간선거 후 결정하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출마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준비 작업으로 16일 자신의 정치 철학을 담은 책도 출간됩니다. ‘공화당 구조: 진실 거부자들, 음모 이론가들, 조 바이든의 위험한 정책으로부터 공화당 구하기’라는 긴 제목에서 보듯이 바이든 행정부 보다 트럼프 비판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정치분석가들은 “미국 유권자들은 크리스티 전 주지사처럼 ‘내러티브(화제의 흐름)’를 바꿀 줄 아는 정치인에게 공감하는 성향이 강하다”고 합니다. 크리스티의 도전이 성공할 지는 미지수지만 그동안 트럼프 전 대통령과 그의 지지자들의 기세에 눌려 한숨만 쉬었던 미국인들은 거침없이 반기를 드는 그를 보며 “속이 시원하다”는 반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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