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독일 총선에서 1당이 된 중도좌파 사회민주당이 24일 좌파 녹색당, 우파 자유민주당과 연정을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올라프 숄츠 사민당 대표(63) 또한 다음달 6일 연방하원 표결을 거쳐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후임자에 오른다. 연정 합의문에 석탄발전 중단시기 앞당기기, 최저임금 인상, 투표권 하향, 대마초 합법화 등 진보적 정책이 대거 포함돼 숄츠가 이끌 독일이 중도우파 메르켈 총리의 16년 집권기간 때와 많이 달라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숄츠 대표는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더 많은 진보를 위한 위험(Risk More Progress)’이란 제목의 연정 합의문을 공개했다. △9.6유로인 최저임금을 12유로(약 1만6000원)로 올리고 △18세인 투표권을 16세로 낮추고 △2038년으로 예정됐던 석탄발전 중단 시기를 2030년으로 앞당기는 것 등이 골자다.
함부르크 태생인 숄츠 대표는 변호사 시절 노동자 보호에 앞장섰다. 지난해 11월에는 재무장관 자격으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회복을 위해 재정을 ‘바주카포’처럼 투입해야 한다”고 발언해 ‘바주카포맨’이란 별명도 얻었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에는 임금삭감, 복지축소 등을 앞세운 노동시장 개혁을 옹호하는 등 좌우 진영을 넘나들어 ‘정치적 카멜레온’으로도 불린다고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진단했다. 신중하고 절제된 언행으로 메르켈 총리와도 유사점이 많다는 평을 듣는다. 그가 여자였다면 메르켈 총리가 주로 입는 바지정장을 입었을 것이라고 NYT는 전했다.
아날레나 베어보크(40), 로베르트 하벡(52) 녹색당 공동대표는 새 정부에서 각각 외무장관과 경제기후보호장관을 맡기로 했다. 크리스티안 린드너 자민당 대표(42)는 재무장관에 오른다.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던 사민당은 이후 두 달간 연정 구성을 추진해왔으며 독일 역사상 3당 연정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민당, 자민당, 녹색당의 당 색깔이 각각 빨강, 노랑, 초록이어서 일명 ‘신호등 연정’으로도 불린다.
공영방송 도이체벨레는 ‘인권’을 중시하는 새 연정이 메르켈 집권 때보다 중국과 러시아에 한층 강경한 노선을 취할 것으로 내다봤다. 메르켈 총리는 집권 중 중국을 12차례나 방문했다. 독일은 2016년부터 현재까지 미국을 제치고 중국의 최대 교역국 위치를 지키고 있다. 새 연정의 3당은 모두 중국의 소수민족 탄압, 화웨이 등 중국산 통신장비의 사이버 보안 문제, 독일의 과도한 중국경제 의존도 등을 이유로 중국과의 거리두기를 주장하고 있다. 특히 베어보크 녹색당 대표는 9월 총선 당시 “강제 노동으로 생산된 중국 제품을 독일에 들일 수 없다”고 규탄했다.
합의안에 새 정부가 러시아에 맞서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의 핵 공유 협정에 계속 참여하겠다는 내용도 담겼다. 미국은 독일에 유럽 최대인 3만5000명의 미군을 뒀고, 남서부 뷔헬 공군기지에는 약 20개의 전술 핵무기를 배치했다. 슐츠 대표 역시 이날 기자회견에서 “유럽의 주권, 프랑스와의 우호, 미국과의 파트너십을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3당의 노선이 상당히 달라 향후 정책결정 과정에서 불협화음이 발생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특히 각각 복지와 기후대응을 강조하는 사민당과 녹색당의 정책은 감세, 규제완화 등을 주창하는 자민당과 큰 차이가 있다. NYT는 연정 내부의 의견 차가 심해지면 국제사회에서 독일의 지도력이 상실될 수 있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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