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주요 통일외교안보 국책연구기관의 수장들이 30일(현지 시간) 워싱턴에서 북한 비핵화 협상 교착에 대한 미국의 책임론을 거론하며 한목소리로 종전선언을 촉구했다. 그러나 워싱턴의 학계와 싱크탱크 인사들이 이에 줄줄이 우려 혹은 비판 의견을 내면서 종전선언에 대한 한미 간의 이견차를 재확인했다.
홍현익 국립외교원장은 이날 워싱턴의 싱크탱크인 우드로윌슨센터가 ‘북-미 관계 전망’을 주제로 개최한 세미나에서 “종전선언이 결국 안 된 채로 가게 되면 내년 여름은 굉장히 위험한 여름이 될 것”이라며 종전선언을 촉구했다. 북한이 내년 2월 베이징 올림픽과 3월 한국 대선까지는 지켜보겠지만 이후 4월부터 미국의 중간선거가 있는 11월 사이에 도발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는 것.
홍 원장은 이어 “미국이 북한을 다루는 일에서 잘 하지 못했다”며 “북한 입장에서 미국은 믿을 수 없는 나라이며, 말은 거창한데 행동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이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와 중장거리 미사일 발사 중단 등의 ‘성의’를 보였는데 미국이 아무런 상응조치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것 등을 이유로 들었다.
그는 “경제력이 북한보다 600배 강하고 핵무기도 300배 갖고 있는 미국이 북에 과연 핵 포기할 기회를 줬는지 생각해봐야 한다”며 “북한 목을 졸라매면서 ‘너 죽일 거야’하면 북한 지도자가 과연 핵을 포기하려 하겠는가”라고 참석자들에게 물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고르바초프로 만들어야 하는데 우리가 스탈린으로 만들고 있는 건 아니냐”고도 했다. 러시아의 개혁, 개방을 이끌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처럼 김 위원장을 만들 수 있음에도 미국이 그를 독재자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도록 몰아붙이고 있다는 취지였다.
홍 원장은 그러면서 “미국은 북한이 핵을 포기할 수 있는 진정할 기회를 줘야 한다”며 “그 첫 번째 단계로 종전선이라도 해주자는 게 문재인 대통령의 제안”이라고 했다. 대북제재도 ‘스냅백(snap-back·약속 불이행시 제재 재도입)’ 조건을 걸고 완화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세미나의 한국 측 패널로 함께 나선 고유환 통일연구원장도 “북한이 핵을 버리고 경제 발전시키겠다고 결심하고 나오는 과정에서 먼저 선행조치 취했는데 선순환이 이뤄지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종전선언을 둘러싼 남북미 간의 입장차가 조율돼야 한다고 지적하면서도 “상황을 파국으로 끌고 가지 못하게 하려면 한국과 미국이 대화 재개 촉진을 위해 종전선언을 제안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기정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도 “평화와 안정 달성을 위한 여러 노력이 70년 이상 이뤄져왔음에도 여전히 평화를 얻지 못하고 있다면 뭔가 다른 것을 시도해봐야 한다”며 “한반도 평화를 위해 종전선언이 가능하다”고 거들었다.
이들의 모두발언이 끝나고 질의응답이 시작되자 워싱턴 측 인사들의 반박이 쏟아졌다. 브루스 클링너 헤리티지재단 선임연구원은 북한 미사일이 주한미군을 살상할 수 있는 무기이며, 유엔의 대북제재 결의가 발사를 금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북한이 장거리미사일 발사를 안 했다고 칭찬해주는 것은 ‘오늘 살인 안 했으니 잘했다’고 칭찬해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꼬집었다. 북한이 과거 외교적 구속력이 있는 문서를 이행하지 않고, 한미연합 군사훈련 등의 조건을 끊임없이 요구해왔다는 점도 지적했다. 윌리엄 브라운 조지타운대 교수는 “한국, 중국, 러시아 모두 북한에 수천 억 달러에 달하는 원조를 70년 간 제공했다”며 “경제학적으로 굉장히 많은 보상을 받고도 동기 부여가 안 된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의미냐”고 반문했다.
종전선언 관련, 데이비드 맥스웰 민주주의수호재단(FDD) 선임연구원은 “한미 관점에서 위험한 부분들이 있어 파국으로 가기 쉽다”고 우려했다. “북한은 여러 협박과 무력을 통해 한반도를 점령하려는 모습을 보여왔고 이는 지난 70년 간 바뀌지 않았다”며 북한이 최근에도 새로운 무기 체계들을 계속 선보이고 있다는 점도 함께 지적했다. 랜드연구소의 스캇 해럴드 선임연구위원은 “한국이 종전선언을 너무 밀어붙이면 미국과의 신뢰를 흔들 수 있고 한미 관계에 큰 해를 입힐 수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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