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왜 우크라-카자흐에 군사개입할까
공동체 재건 나선 ‘스트롱맨’
푸틴의 파워 뒤엔 천연가스
‘강한 러시아’로 내부 불만 무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등 소련 소속이던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각국에서 전 방위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소련과 제정 러시아에 대한 국민 향수를 자극해 장기 집권의 발판으로 삼으려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소련의 부활’ 꿈꾸는 푸틴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군사 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10일 미국과 러시아의 양자 회담, 12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러시아의 회담에 이어 13일 미국 러시아 등 57개국이 참여한 유럽안보협력기구(OSCE)에서도 서방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지 못했다. 마이클 카펜터 OSCE 주재 미국대사는 “전쟁의 북소리가 크게 들린다”며 긴장 고조에 대비해야 한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실제 군사 충돌로 번질지는 이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선택에 달렸다는 관측이 나온다.
1991년 12월 26일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였던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진 직후 소련의 주축인 러시아는 한때 극심한 사회 혼란과 경제난을 겪었다. 몰도바 벨라루스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우즈베키스탄 우크라이나 조지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등 나머지 14개국은 독립을 이뤘다.
역설적이게도 소련 붕괴 30년이 흐른 지금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소련 소속이었던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각국에서 전방위적으로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다. 2014년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강제 합병한 그는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조지아 내 미승인 독립국 남오세티야, 몰도바 내 미승인 독립국 트란스니스트리아 등에 군사 및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이 지역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다. 반정부 시위가 벌어진 벨라루스와 카자흐스탄에는 치안 안정을 명목으로 러시아군을 파견했다.
존 볼턴 전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9일 월스트리트저널(WSJ) 기고문을 통해 카자흐스탄의 정정 불안이 옛 소련의 재탄생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특히 그는 나토가 ‘규칙에 근거한 국제질서’ 같은 수사(修辭)에만 매달리지 말고 러시아의 확장을 제어해야 한다는 뜻을 거듭 강조했다. 미국이 중국과의 패권 다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수습 등으로 러시아 견제에 다소 소홀해진 틈을 타 ‘강한 러시아’를 주창해온 푸틴의 꿈이 현실화할 수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 집권 내내 옛 소련 국가에 개입한 푸틴
푸틴 대통령은 2005년 국회 연설에서 “소련 붕괴가 20세기의 최대 지정학적 재앙”이라고 했다. 그는 2000년 집권 이후 줄곧 옛 소련 붕괴에 대한 아쉬움, 주변국과의 연대를 강조해왔다.
러시아는 2002년 벨라루스, 아르메니아,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과 집단안보조약기구(CSTO)를 창설했다. 6개국 내 군사 위협, 비상사태, 국제 테러 등에 공동으로 대응할 수 있는 신속 대응군을 만든 것이다. 이달 2일부터 시작된 카자흐스탄 반정부 시위에도 CSTO군이 파견됐다. 이번에 파견된 2500명의 대부분은 러시아군으로 추정된다. 미 워싱턴포스트(WP)는 CSTO군의 임무가 시위 진압 외에도 러시아가 운영하는 카자흐스탄 내 바이코누르 우주기지를 보호할 목적도 있다고 분석했다.
러시아는 2008년 8월 조지아 정부에 맞서 분리주의 운동을 벌이던 남오세티야의 러시아계 주민을 보호한다며 조지아도 침략했다. 전쟁 개시 불과 5일 만에 일방적 승리를 거뒀지만 미국이 군사 개입을 선언하자 철군했다. 아직까지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지는 못했지만 이 전쟁으로 남오세티야는 독립을 선언했다. 이후 심심찮게 남오세티야에서는 러시아와의 합병 논의가 벌어지고 있다.
러시아는 또 2015년 카자흐스탄, 벨라루스, 아르메니아, 키르기스스탄과 유럽연합(EU) 같은 단일 시장을 만들겠다며 유라시아경제연합(EAEU)도 출범시켰다.
푸틴은 2020년 8월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의 6연임 부정선거 논란으로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자 공수부대가 포함된 군대를 투입해 루카셴코를 도왔다. 한 달 후 기독교 국가 아르메니아와 이슬람 국가 아제르바이잔이 전쟁을 벌이자 양측의 영유권 분쟁지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또 군대를 보냈다.
러시아는 벨라루스와 폴란드가 중동 난민의 월경 문제로 갈등을 빚자 지난해 11월 벨라루스에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전략 폭격기를 보내고 연합 군사훈련을 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같은 달에는 우크라이나 국경지대에 10만 대군을 투입해 전쟁 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푸틴은 지난해 12월 “소련의 붕괴는 비극이었다”며 한때 정보기관 KGB 요원이었던 자신 또한 경제난에 택시를 몰아야 했다고 했다. 또 “1991년 소련 붕괴 당시 우리는 스스로를 12개로 나눴다”고도 주장했다. 옛 소련 15개국 중 반러 성향이 짙은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등 발트해 3개국을 의도적으로 뺀 것이다. 그는 옛 소련 소속국 중 2004년 나토에 가장 먼저 가입해 확고하게 서방의 편에 선 3개국을 눈엣가시로 여겨 왔다. 이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국가와 군사 및 경제 통합을 가속화해 옛 소련, 나아가 제정 러시아 시절의 영화를 되찾겠다는 목표를 드러낸 셈이다.
그는 이달 10일 카자흐스탄에 CSTO군을 파견한 것을 두고 “외부세력과 테러범으로부터 카자흐스탄을 보호했다”고 자찬했다. 특히 주변국의 ‘색깔 혁명(color revolution)’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색깔혁명은 조지아(장미혁명·2003년), 우크라이나(오렌지혁명·2004년), 키르기스스탄(튤립혁명·2005년), 아르메니아(벨벳혁명·2018년) 등 옛 소련 국가에서 반정부 시위로 친러 정권이 붕괴된 사건이다. 러시아는 줄곧 서방이 배후에서 색깔혁명을 주도했다고 주장해 왔다. 앞으로도 인접국의 반정부 시위에 적극 개입해 러시아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반러 정권이 들어설 여지를 차단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WSJ에 따르면 푸틴은 러시아가 다른 나라의 존경을 받는 동시에 두려워하는 초강대국으로 남기를 원한다.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 시절 러시아 주재 미국대사를 지낸 마이클 맥폴은 “그는 러시아의 영향권에 대해 18, 19세기 지도자처럼 사고한다”고 평했다. 우준모 선문대 국제정치학과 교수 역시 “러시아는 예전부터 옛 소련 국가를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 공동체의 지도자 역할을 하는 것을 열망해 왔다”며 카자흐스탄 반정부 시위 개입, 우크라이나 침공 위협 등도 이런 큰 흐름에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 광폭 행보의 자금줄은 천연가스
옛 소련의 영광을 꿈꾸는 푸틴 대통령의 광폭 행보를 가능케 하는 원천은 바로 천연가스다. 러시아는 천연가스 매장량이 세계에서 가장 많다. 2019년 러시아 정부 자료에 따르면 천연가스를 포함한 에너지 자원의 가치가 844억 달러(약 101조2800억 원)에 달했다. 같은 해 러시아 국내총생산(GDP)의 60%와 맞먹는다. 또 현재 유럽에서 사용되는 천연가스의 약 35%가 러시아산이다. 유럽 최대 경제대국 독일에서는 이 비율이 40%로 올라간다.
홍완석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장은 “러시아는 소위 ‘에너지 이중가격제’를 통해 친러 국가에 시장가의 3분의 1 수준으로 에너지를 제공하고 있다. 벨라루스 같은 수혜국 역시 이를 시장에 다시 팔아 수입을 얻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런 방식의 경제 원조에 군사 지원까지 더해져 옛 소련 국가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천연가스는 우크라이나의 전쟁 위기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현재 러시아산 가스는 크게 세 경로를 통해 서유럽으로 향한다. 우크라이나를 지나는 ‘노르트스트림1’, 폴란드를 통과하는 ‘야말·유럽 가스관’, 지난해 말 완공됐지만 미-러 갈등 등으로 정식으로 운영되지 못하고 있는 ‘노르트스트림2’다.
노르트스트림2는 러시아 서부 나르바부터 발트해를 거쳐 독일 북부 그라이프스발트를 잇는 1230km의 해저 가스관이다. 다른 2개 가스관과 달리 육로를 전혀 통하지 않는다. 개통되면 연간 유럽 전체 천연가스 수요의 약 4분의 1인 550억 m³의 러시아산 가스가 독일로 공급된다.
조 바이든 미 행정부는 푸틴 정권의 인권 탄압, 우크라이나 침공 위협 등을 이유로 노르트스트림 관련 기업을 제재하고 독일에도 가스관을 잠그라고 압박해왔다. 우크라이나 또한 노르트스트림2가 개통되면 유럽의 에너지 공급원이라는 자신의 지위가 사라질 것을 두려워한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등의 비상사태 때 서방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필요성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반면 전 유럽을 상대로 가스 패권을 확대하려는 러시아는 수송로의 다변화가 절실하다. 러시아가 서방의 반발을 알면서도 우크라이나 국경에 10만 대군을 배치한 것은 서방과 우크라이나에 노르트스트림2를 방해하지 말라고 경고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푸틴 대통령은 걸핏하면 가스관을 조였다 풀었다 하며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그는 갑자기 EU에 더 많은 가스를 보내라고 지시했다. 이로 인해 당시 유럽 천연가스 가격은 이틀 새 약 25% 급락했다. 노르트스트림2 정식 개통에 대한 독일의 승인을 압박하기 위한 목적이란 분석이 제기됐다.
지난해 12월 21일 러시아 국영 에너지기업 가스프롬이 ‘야말·유럽 가스관’ 수송물량 경매에 불참해 가스 공급이 중단되자 천연가스 가격은 하루 만에 23% 치솟아 역사상 최고가를 찍었다. 이달 5일에도 미-러 갈등 등으로 러시아가 천연가스 공급을 줄일 것이란 우려에 천연가스 가격이 하루 만에 30% 이상 올랐다.
○ 장기집권·경제난에 대한 반발 무마 용도
푸틴의 행보가 그의 장기 집권과 경제난에 대한 내부 반발을 무마하려는 용도라는 분석도 나온다. 그는 2020년 국민투표를 통해 자신이 84세가 되는 2036년까지 집권할 수 있도록 헌법을 고쳤다. 그때까지 집권하면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31년)을 뛰어넘어 제정 러시아 이후 가장 오랜 시간 러시아를 통치한 인물이 된다. 이로 인한 국민 피로감 역시 갈수록 커지고 있다. 미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스에 따르면 2017년 ‘러시아에서 가장 신뢰하는 정치인’ 조사에서 응답자의 59%가 푸틴을 꼽았지만 2021년 2월 같은 조사에선 이 수치가 32%로 떨어졌다.
경제도 예전 같지 않다. 중국 경제의 급성장으로 세계 원자재 가격이 치솟던 2000년대 한때 러시아 경제는 연 8%의 고성장을 이뤘다. 하지만 2014년 크림반도를 강제 합병한 후 국제사회의 제재가 이어지자 2013∼2019년 실질 가계 소득이 매년 감소했다. 코로나19가 발생한 2020년엔 아예 성장률이 ―3.0%로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이런 상황을 옛 소련과 제정 러시아의 부활이라는 민족주의 감성 자극, 서방이라는 ‘외부의 적’ 등을 이용해 돌파하려 한다는 의미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푸틴이 2014년 크림반도 합병 후 자신의 인기가 얼마나 올랐는지를 잘 기억하고 있다며 앞으로도 그의 개입주의 행보가 계속될 것으로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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