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전 상원의원을 암살한 범인의 가석방이 거부됐습니다. 최근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케네디 전 의원 암살범인 팔레스타인 출신의 이민자 시르한 비샤라 시르한(77)의 가석방 권고를 거부했다고 밝혔습니다.
케네디 전 대통령 암살범인 리 하비 오스월드가 이미 사망한 것과 달리 케네디 전 의원을 암살한 시르한은 생존해 캘리포니아 주 교도소에서 53년째 수감 중입니다. 1968년 42세 나이에 대선에 출마한 케네디 전 의원은 캘리포니아 주 예비선거에서 승리한 뒤 로스앤젤레스의 한 호텔에서 열린 축하행사 현장에서 시르한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습니다. 케네디 전 대통령 암살 5년 후 비슷한 방식으로 동생이 암살됐다는 점, 마틴 루터 킹 목사 암살 2개월 후 터진 암살 사건이라는 점 등 때문에 케네디 전 의원 사망이 던진 충격파는 컸습니다. 1960년대 리버럴리즘(자유주의)을 상징하는 두 형제가 몇 년 간격으로 암살되면서 “카멜롯(태평성대) 시대의 종언” “케네디 가문의 저주” 등의 유행어가 생겨났습니다.
시르한은 체포된 뒤 법정 진술에서 “케네디의 친(親)이스라엘 정책에 불만을 품고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언론과의 옥중 인터뷰에서 “내 손에 총을 든 기억이 없다”고 주장하는 등 범행 여부에 대해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가석방 심사위원회는 지난해 8월 청문회에서 “더 이상 사회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면서 시르한에 대한 가석방 권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16번째 심사 만에 처음 나온 권고 결정이었습니다. 앞선 심사 때마다 반대 의견을 냈던 캘리포니아 주 검찰도 지난해 8월 심사에서는 아무런 의견도 내지 않으면서 암묵적인 동의 의사를 표했습니다. 최근 캘리포니아 주가 일정 기간 형량을 마친 장기 수감자를 더 이상 감옥에 두지 않고 사회 복귀를 유도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것도 가석방 허용 분위기에 불을 지폈습니다. 하지만 가석방 시도가 최종 문턱에서 주지사에 의해 좌절되자 시르한 변호인단은 크게 반발했고, 법조계와 언론에서는 “의외의 결정”이라는 반응이 나왔습니다.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역시 케네디”라는 얘기가 흘러나왔습니다.
뉴섬 주지사는 이례적으로 9장에 걸친 보도자료를 통해 가석방 권고를 거부한 이유를 상세히 설명했습니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에 “왜 나는 시르한 시르한을 가석방하지 않기로 했나”라는 제목의 기고문도 게재했습니다. 시르한이 아직 자신의 범행을 온전히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 지금 출소하면 여전히 공공의 안전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점 등 크게 두 가지 이유를 들었습니다. 주지사는 “시르한은 과거 자신이 내렸던 위험하고 파괴적인 결정들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통찰력을 보여주지 못했다”면서 “그는 아직 해야 할(뉘우칠) 일이 많다”고 했습니다. 그는 “형제애를 나눈 국민이 되기 위해서는 서로의 상처를 봉합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케네디 전 의원의 발언을 인용하며 로스앤젤레스타임스 기고문을 끝맺었습니다.
주지사의 적극적인 설명에도 불구하고 케네디 전 의원이 생전에 추구했던 사법 정신에 비춰볼 때 이번 결정은 “지나치다”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존 F 케네디 행정부에서 법무장관을 지낸 케네디 전 의원은 재소자 인권 향상과 사법당국의 과잉 형량을 줄이는 데 힘을 쏟았기 때문입니다. 1963년 흉악범을 수용하는 감옥으로 사용됐던 앨커트래즈 교도소 폐쇄 결정을 내린 것도 당시 법무장관이던 케네디 전 의원이었습니다. 시르한 변호팀은 “가석방 거부 결정을 내리면서 교정 개혁을 중시했던 로버트 케네디를 거론한 것은 참 아이러니하다”고 비판했습니다.
법조계에서는 주지사의 이번 결정이 정치적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옵니다. 뉴욕타임스는 “최근 낙마 위기를 극복한 주지사가 케네디 가문의 영향력을 계산에 넣지 않고 이번 결정을 내렸을 것으로 보기 힘들다”고 전했습니다. 시르한 변호팀 역시 “정치적 결정”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코로나19 봉쇄정책에 대한 주민 반발이 거세지면서 지난해 9월 소환투표에 회부됐던 뉴섬 주지사는 민주당의 지지를 발판으로 주지사직 사수에 성공했습니다. 조 바이든 대통령까지 캘리포니아를 찾아 주지사 지지 운동을 벌였습니다. 케네디 가문으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뉴섬 주지사는 평소 케네디 전 의원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내왔습니다. 자신의 사무실 책상 위에 케네디 전 의원과 캘리포니아 주 고등법원 판사를 지낸 아버지가 함께 찍은 사진을 액자에 넣어 걸어두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케네디 가문은 시르한 가석방 가능성이 제기되자 전방위적으로 반대 로비를 펼쳐왔습니다. 케네디 전 의원의 부인인 올해 94세의 에델 여사와 자녀 6명은 가석방 권고 결정이 나오자마자 뉴섬 주지사에게 “가석방을 허용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서한을 보냈습니다. 막내딸인 로리 케네디 영화감독은 뉴욕타임스 기고에서 “시르한은 가석방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장남인 조 케네디 2세 전 하원의원은 보도자료를 통해 “우리 자녀들은 아빠를 그리워하며 자랐다”면서 “그 어떤 서류도, 법적인 결정도 이런 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했습니다. 반면 셋째인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 변호사와 열째인 더글러스 케네디 폭스뉴스 기자는 가해자를 용서한다며 가석방을 허용해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했습니다. 케네디 전 의원은 에델 여사와의 사이에 11명의 자녀를 낳았고, 이중 2명이 사망했습니다.
‘케네디’라는 이름은 미국인들에게 복합적인 감정을 유발합니다. 동경의 대상인 반면 자주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르기도 합니다. 그동안 사회적 윤리와 법적 테두리를 넘는 각종 스캔들을 일으켜 비판의 대상이 됐다면 이번 시르한 가석방 거부 결정은 케네디 가문을 모처럼 피해자의 앵글에서 볼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감옥에서 노인으로 변한 시르한이 지금 가석방된다고 하더라도 공공의 위협이 될 가능성은 사실상 희박하지만 피해자 가족에게 용서는 힘든 단어임에 분명합니다. 2023년에 있을 다음 가석방 심사 때는 어떤 일이 펼쳐질지 주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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