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등 서방이 일부 러시아 은행을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망에서 퇴출하고 러시아 중앙은행의 외환보유액을 동결하는 강력한 제재안을 내놓았다. 사실상 러시아의 대외 금융 및 무역 거래를 원천 차단하고 달러화의 국내 도입을 막아 국가 재정과 금융시장에 상당한 타격을 주겠다는 의도다. 국제금융에서 고립시키는 SWIFT 결제망 퇴출은 제재 효과가 워낙 커서 금융 부문의 ‘핵 옵션’(극단적 선택)으로도 불린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은 국가 정상인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교장관까지 이례적으로 제재 대상에 올렸다.
핵보유국인 러시아는 “모든 핵무기 감축 조약에서 탈퇴할 수 있다”고 핵위협을 거론하며 서방과 단교할 의사를 밝혔다. 특히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국경을 맞댄 벨라루스에 핵무기 배치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 벨라루스는 27일 러시아의 핵무기를 자국에 배치하는 것을 허용하는 개헌안 국민투표를 한다고 돌연 밝혔다. 나토는 긴급 정상회의를 열고 동유럽에 병력을 대폭 증강한다고 밝혔다. 1991년 소련 붕괴와 냉전 종식 31년 만에 유럽을 중심으로 2차 냉전이 사실상 시작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 美, 금융의 ‘핵 옵션’ 꺼냈다
이번 서방의 제재에 동원된 SWIFT는 세계 200여 개국 1만1000개 금융기관이 가입돼 있는 금융 결제망이다. 여기서 퇴출될 경우 국제 금융 거래와 주문이 불가능해지고 기업들은 수출 대금을 받을 수 없다. 하지만 그만큼 부작용도 만만치 않아 그동안 독일 등 일부 유럽 국가는 이를 제재 방안에 포함시키는 것을 주저해 이틀 전 러시아 제재에선 빠졌다. 러시아를 SWIFT에서 퇴출하면 러시아로부터 원유 등 자원 수입이 어려워지는 데다, 러시아 금융기관에 빌려준 돈을 회수하지 못 하게 될 수 있다는 우려가 큰 만큼 컸다.
이번에도 이런 우려에 따라 미국 등 서방은 러시아의 일부 금융기관만 제재 대상에 올리기로 했다. 에너지 구입 등을 위해 서방에 필요한 곳은 결제망에 그대로 남기면서 부작용을 줄이고 제재 효과를 유지하겠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제재 대상 금융기관들에 따라 파장의 정도가 달라질 것으로 전문가들은 봤다.
러시아 중앙은행의 외환보유액 동결도 파급력이 매우 클 것으로 예상된다. 러시아의 외환보유액은 6400억 달러가량으로 대부분이 미국과 유럽 금융기관들에 예치돼 있다. 이 막대한 외환보유액이 동결되면 러시아로의 달러 공급이 끊겨 루블화 가치가 폭락하고 금융기관들이 줄도산하는 등 엄청난 충격이 발생할 위험이 크다. 워싱턴포스트(WP)는 “러시아는 미국에 제재를 당한 은행들을 살리기 위해 보유 외환을 활용할 수 있었지만 이제 그 옵션이 어려워지게 됐다”고 했다.
● 러, 벨라루스에 핵무기 배치 움직임
푸틴 대통령은 이번 제재로 미국과 EU 내 자산이 모두 동결된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푸틴 대통령의 자산은 숨겨진 것까지 합해 1000억 달러(약 120조 원)에 이른다고 뉴욕타임스(NYT)는 보도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26일 “러시아는 심각한 대가를 치를 것이며, 장기적으로는 유럽뿐 아니라 일본과 한국, 호주에서도 그렇다”면서 “전 세계 민주주의 국가들이 함께할 것”이라고 했다.
푸틴 대통령에 대한 제재는 푸틴 대통령을 국가수반이나 외교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고 국제사회에서 퇴출시킨다 상징성이 크다. 미 재무부는 제재를 발표하면서 “한 국가 정상을 제재 대상으로 정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면서 “푸틴 대통령은 이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 같은 폭군을 포함하는 매우 작은 집단에 합류했다”고 밝혔다.
러시아 전직 대통령이자 푸틴 대통령의 측근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은 26일 “러시아는 남아 있는 모든 핵무기 감축 조약으로부터 탈퇴하는 것으로 제재에 대응할 수 있다”며 “우리는 (서방과의) 외교 관계가 특별히 필요치 않다. 지금은 대사관을 폐쇄하고 쌍안경을 통해 서로를 바라보며 연락해야 할 때”라고 밝혔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26일 “러시아가 벨라루스에 핵무기 배치를 승인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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